정원은 2인이다. 고려시대 중추원의 당후관(堂後官)이 1400년(정종 2)에 승정원 당후관으로 되었다가 뒤에 주서로 개칭된 것이다. 승정원의 기록, 특히『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하여 청요직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초기에는 사관(史官)을 겸하지 않았으나 1457년(세조 3) 7월부터 비로소 춘추관기사관을 당연직으로 겸임하게 하여 사초(史草)의 기록이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의금부·전옥서(典獄署) 등에 중요 형옥이 있을 때에는 그 심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 업무가 과중하게 되자 선조 때부터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인을 증치하여 비변사와 국옥(鞫獄)에 관한 문서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가설주서(假設注書) 2인을 더 두기도 하였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이후 폐지하였다. 다만, 주서 2인이 모두 궐원이 되었을 때에는 가주서를 임시로 선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