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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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국왕 · 왕세자 · 왕세손 등의 가례(혼례)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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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국왕 · 왕세자 · 왕세손 등의 가례(혼례)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 관서.
내용

1397년(태조 6) 10월 왕세자 방석(芳碩)의 혼례를 위해 가례도감을 설치한 것이 효시이다. 국혼의 의론이 확정되면 설치되었고 모든 행사가 끝난 뒤에 해체되었다.

여기에는 도제조(都提調, 정1품) 1인, 제조(提調, 정2품) 3인, 도청(都廳, 정3∼5품) 2인, 낭청(郎廳, 5∼6품) 6인, 감조관(監造官, 9품) 6인, 그리고 정사(正使, 정1품) 1인, 부사(副使, 정2품) 1인, 전교관(傳敎官 : 승지) 1인, 장축자(掌畜者 : 掌苑署別提) 1인, 장차자(掌次者 : 典設司官員) 1인 및 산원(算員)·녹사(錄事)·서리(書吏)·서사(書寫)·고직(庫直)·사령(使令)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도제조는 삼정승 중에서 선임되었고, 제조 중 2인은 보통 예조판서와 호조판서가 당연직으로 임명되었다. 또, 도청에는 보통 홍문관의 응교·교리가 임명되어 문한(文翰)의 일을 장악하였다.

이상의 관원들은 경우에 따라 증감이 있었는데, 특히 세손의 가례 때에는 도제조가 없고 제조는 2인, 낭청은 3인으로 감원되었다.

가례도감은 업무 분장을 위해 다시 1방·2방·3방·별공작(別工作)·수리소(修理所) 등으로 세분하여 조직되었다. 다만 세손의 가례 때에는 2방으로 조직되었다. 왕실 가례의 기간은 보통 2∼6개월이 소요되었다.

이 동안의 주요 행사는 간택(揀擇)·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책비(冊妃)·친영(親迎)·동뢰연(同牢宴)·조현례(朝見禮)였다.

가례도감은 이들 행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그 중 중요 업무는 교명(敎命)·옥죽책문(玉竹冊文)·금보(金寶)의 제찬과 사자(寫字), 의례의 연습과 시행, 필요한 물자의 조달, 기록의 작성·보존 등이었다. 이 일들이 원만히 끝나면 도감의 임원들에게 포상이 베풀어지고 임시 기구는 해체된다.

가례도감 설치 때의 조직·업무·예규·행사·결과 등 모든 사항은 의궤로 작성되어 궁중·의정부·예조·사고(史庫) 등에 보존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의궤는 남아 있지 않으나, 인조 이후의 가례도감 의궤들은 대부분 잘 보존되어 당시 왕실의 혼인 예법과 실태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정조효의왕후가례도감의궤』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
『증보문헌비고』
『조선조의 의궤』(박병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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