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전은 조선 후기 태조 이하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전각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도성 내 진전이다.
영희전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궁궐 안 선원전(璿源殿)과 전주·영흥·평양·개성·경주 등 외방의 태조 진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도성 안에 건립되었다. 1619년(광해 11)에 평양 영숭전(永崇殿)에 있던 태조 어진과 광릉 봉선전(奉先殿)에 있던 세조 어진을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사당이던 서울 봉자전(奉慈殿)에 옮기고 남별전(南別殿)으로 고쳐 불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남별전의 어진을 강화부로 옮겼는데, 1636년 병자호란 때 태조 어진은 크게 손상되어 묻어 버렸다. 되찾은 세조 어진은 서울로 가져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어진과 함께 중수한 남별전에 옮겼다. 외방 진전 중 영흥 준원전(濬源殿)과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은 난 중에도 무사히 보존되었다.
1677년(숙종 3) 남별전을 3실로 중건하였으나 여전히 세조와 원종 어진만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1688년(숙종 14)에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서울로 가져와 모사한 후 남별전의 남은 칸에 봉안하였다. 1748년(영조 24) 영희전을 5실로 중건한 후 창덕궁 선원전에 있던 숙종 어진을 모사하여 영희전 제4실에 봉안하였다. 남은 한 칸은 영조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조 사후 경희궁 태녕전(泰寧殿)에 있던 어진 중 1744년 갑자년 면복본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영희전의 제향은 조선 전기 문소전 제향과 같이 중사(中祀)에 속하였다. 매해 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이 공식 제향일이었고, 종묘 제향보다 전통적인 제향 방식인 속절 제향의 형식으로 제사 지냈다. 숙종은 3년에 한 차례 영희전에 친림하여 작헌례를 올리도록 정식화하였다. 영조는 영희전 작헌례에 재계하는 규정을 마련하고, 6차례 제향 중 한 번의 제향은 왕이 친향하는 규정도 마련하였다. 이처럼 숙종대에서 영조·정조대 사이에 영희전은 태조와 세조, 원종, 숙종,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진전 제향을 올리는 장소, 종묘에 버금가며 종묘보다 친근한 방식으로 역대 왕들을 추모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19세기에 영희전은 진전의 칸 수를 계속 늘리지 말라는 영조의 유교에 따라 5실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궁궐 안의 진전인 창덕궁 선원전에 숙종 이후 역대 왕들의 어진이 계속 추가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선원전과 영희전 외에도 강화부 장녕전(長寧殿), 화성의 화령전(華寧殿) 등 숙종, 영조,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외방 진전이 있었고, 육상궁(毓祥宮)·경모궁(景慕宮)·경우궁(景祐宮) 등 사친의 궁묘에도 어진 봉안각이 있었다.
영희전은 철종대에 이르러 다시 변화를 겪었다. 안동 김씨 세도 하에서 왕위에 오른 철종은 1857년 순원왕후 국장 후 순조의 묘호를 순종에서 순조로 바꾸고, 영희전을 중건한 후 순조 어진을 제6실에 봉안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영희전을 경모궁 터로 이전하였다. 영희전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은 1885년 한성조약 이후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상권이 확대되고 있었다.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영희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건립되면서 국가적 제향 장소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입었다. 때마침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장종(莊宗)으로 추숭하면서 사당인 경모궁이 비게 되자 이 자리에 영희전을 새로 짓고 각 실의 어진을 옮겨 봉안하였다. 경모궁 망묘루에 있던 5대의 어진은 선희궁 평락정(平樂亭)으로 옮겼다. 같은 시기 창덕궁의 선원전도 고종 황제의 새 궁궐인 경운궁으로 옮겼다. 이 신선원전의 1실에는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이모하여 봉안하였다. 시어(時御) 궁궐이 바뀔 때를 대비하여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도 1실을 늘려 건립하였다. 이후 화재로 경운궁 신선원전의 7대 어진이 모두 불타 버렸지만, 바로 복구하였다.
7실의 경운궁 신선원전과 6실의 경모궁 자리 영희전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1907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종은 향사이정에 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서울의 영희전, 개성 목청전, 수원 화령전, 육상궁 냉천정, 선희궁 평락정, 경우궁 성일헌에 봉안되던 역대 왕들의 영정은 모두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옮겨졌고, 어진을 봉안하던 장소들은 모두 국유지로 귀속되어 역사적 역할을 마쳤다.
영희전은 숙종대에서 정조대를 거치면서 종묘에 버금가는 왕실 조상의 공적 기념 장소로 자리 잡았다. 궁궐 안에서 선왕의 어진을 봉안하고 기념하던 선원전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진전으로 역할하며 1907년까지 유지되었다. 영희전의 역사와 제향 사실을 통해 조선시대 어진이라는 왕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