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전(穆淸殿)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초상화(어진)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개성에 있던 태조 옛 집에 세워져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899년 황실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복구되었다가 1907년 칙령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1418년(태종 18)에 개성부 숭인문 안 어배동(於背洞)의 태조 잠저에 영전(影殿)을 세우게 하였고, 이듬해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후 준원전의 예에 의해서 속절(俗節)에 사신을 보내 제사 지냈다. 영흥, 전주, 평양, 경주에 있던 태조 진전과 달리 목청전에는 성종이나 중종, 선조가 들러 분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목청전은 불에 타 없어졌지만 숙종이나 영조 등 개성에 행차하였던 왕들은 목청전 옛 터를 찾았다. 숙종은 ‘목청전비계영경지비(穆淸殿丕啓永慶之碑)’라는 어필 비를 세워 태조 진전의 옛 터임을 알렸다.
1899년에는 영희전을 옮기고 경운궁 신선원전의 어진을 옮기면서 신선원전의 1실에 태조 어진을 새로 봉안하였다. 당시 태조 어진은 1872년에 이모한 전주 경기전본 및 서울 영희전본과 1837년 이모한 준원전본이 있었다. 신선원전에는 당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이모본인 준원전본을 새로 모사한 후 봉안하였다.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이 완료된 지 다섯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화재가 발생하여 7실의 어진이 모두 불타 버리자 바로 새로 선원전을 건립하고 7실 어진을 모두 다시 그렸는데, 1실의 태조 어진은 1838년 준원전본을 이모하였다. 이 때 목청전의 복구가 결정되면서 준원전본의 이모본을 목청전에도 봉안하였다. 1907년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목청전,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조선 초 이래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던 목청전은 재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였다.
목청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고도 개성에 위치하여 외방의 태조 진전 중 역대 왕들이 가장 많이 찾아 기념한 곳이기도 하였다. 목청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