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전(璿源殿)은 조선 전기에 원묘인 문소전(文昭殿) 뒤쪽에 있던 전각으로, 선원록과 역대 왕과 왕후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면서 다시 기능이 부활하였고, 이후 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을 차례로 봉안하고 추모하였다. 고종대에 선원전은 창덕궁뿐 아니라 경복궁과 경운궁(慶運宮)에도 지어,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바꿀 때에 대비하였다. 1899년 경운궁의 선원전에 1실을 추가로 짓고,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다. 1907년 제사 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으로 폐지된 영희전과 외방 태조 진전의 어진들을 모두 경운궁 선원전에 옮겼다. 1921년 이왕직에서 창덕궁 내에 신선원전을 12실로 건립하고 영희전과 옛 선원전에 있던 어진을 봉안한 후 향사를 지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선원전은 문소전 뒤쪽에 있던 전각으로, 선원록과 어진을 봉안하던 곳이었다. 1444년(세종 26) 태조와 태종, 왕과 왕후의 어진을 그린 후 건물을 새로 짓고 봉안하게 하였고, 이후 역대 왕과 왕후의 어진들을 선원전에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 선원전은 어진을 봉안한 장소였을 뿐 제향하는 의식은 없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화재로 문소전과 선원전이 파괴되었고, 전란 후에도 복구되지 못하였다. 1695년 숙종은 조정에 알리지 않고 화원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자신의 어진을 그리게 한 후 내시들에게 강화부로 옮기게 하였다. 강화부에서는 어진 봉안각을 새로 만들어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1년에 네 차례 살펴보게 하였다. 이것이 강화부의 장녕전이다. 1713년(숙종 39) 숙종 즉위 40년이 되던 해였는데, 장녕전 어진이 본 모습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하였다며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을 설치하고 어진을 새로 그렸다. 완성된 어진은 장녕전과 궁궐 안 선원전,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숙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선원전에 보관하던 어진을 벽에 펼쳐 봉안하였다. 1748년에는 선원전에 있던 숙종 어진을 모사한 후 영희전 4실에 봉안하였다. 이후 영조, 정조의 어진도 차례로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순조 초반 당시 선원전은 3실의 구조로, 가운데 넓은 어칸에는 숙종 어진을, 동쪽과 서쪽의 협실에 각각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헌종 즉위 후에도 선원전을 증축하지 않다가 1846년(헌종 12)에 5실로 증축한 후 4실과 5실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각각 봉안하였다. 1851년(철종 2)에 다시 6실로 증건한 후 헌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고종은 철종의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하지 않고, 종친부의 천한각(天漢閣)이라는 별도의 전각에 봉안하였다.
이후 선원전은 대한제국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1899년 장헌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숭하면서 비게 된 경모궁(景慕宮) 자리로 영희전을 옮기고, 황제의 새 궁궐인 경운궁에 선원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새 선원전에는 기왕의 6실에 더하여 1실을 추가하였고, 경운궁 외에 경복궁과 창덕궁에도 선원전에 1실을 추가하여 이어할 때에 대비하게 하였다. 선원전의 제1실에는 태조 어진을 새로 봉안하였다. 당시 태조 어진은 1872년에 이모한 전주 경기전본 및 서울 영희전본과 1837년 이모한 준원전본이 있었다. 새 선원전에는 당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이모본인 준원전본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이 완료된 지 다섯 달도 채 안되었던 1900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7실의 어진이 모두 불타 버렸다. 이어서 1901년에 터를 바꾸어 영성문(永成門) 서편에 선원전을 건립하고 7실 어진을 모두 다시 그렸다. 제1실의 태조 어진은 1838년 준원전본, 2실의 숙종 어진은 1748년 영희전본, 3실의 영조 어진은 1744년 육상궁 냉천정본, 4실의 정조 어진은 1791년 선희궁 평락정본(구 경모궁본), 5실의 순조 어진은 1830년 영희전본, 6실의 익종 어진은 1828년 선희궁 평락정본(구 경모궁본), 7실의 헌종 어진은 1846년 선희궁 평락정본을 가져다가 이모하여 봉안하였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고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선원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해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외방의 경기전과 준원전의 어진을 제외한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이 선원전으로 옮겨졌다. 1921년 이왕직에서는 창덕궁 후원 옛 북일영 터에 12실의 선원전을 짓고 영희전과 옛 선원전, 천한전과 중화전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이로써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등 12대의 어진이 창덕궁 신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신선원전에 봉안되었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한다.
선원전은 조선 전기에는 선왕과 선후의 생전 모습을 바라보고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숙종대에 다시 복구된 후 영조대 이후로는 궁궐 안에서 선왕을 추모하고 정치를 계승함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선왕의 기일에는 선원전에서 작헌례를 올렸고,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선원전 재실에서 행하여 정치적 명분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선원전의 역사와 제향 사실을 통해 조선시대 어진이라는 왕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