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숭전(永崇殿)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평양 영숭전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지고, 국가에서 추인하여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태조 어진만 개성을 거쳐 수원으로 옮겼고, 강화도에 영숭전을 세우고 보관하다가 병자호란 때 전각이 파괴되고 초상화가 찢어진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영숭전은 평양의 부로들이 자청하여 고려 장락궁 옛 터에 세운 태조 영전(影殿)이다. 이 곳에 영숭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442년(세종 24)의 일로, 같은 해에 전지기를 두고 영전을 공식적으로 관리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에 평양에 순행한 세조가 영숭전에 들러 제사를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평양의 영숭전 협실에 종묘 각실의 신주와 어보를 봉안하였고, 평양이 함락되기 직전에 영숭전 태조 어진과 종묘 어보를 빼내 모처에 묻어 두었다. 평양을 수복하였을 때 영숭전은 이미 옛 터만 남은 상태였다. 1601년 영숭전 재건을 논의하였으나 실제 재건은 미루어졌다. 영숭전의 어진은 개성과 수원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1619년(광해 11) 서울의 남별전에 이안하였다가 1622년(광해 14) 강화도에 영숭전을 세우고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강화부 영숭전이 파괴되었고 어진도 찢어져 난이 끝난 후 남은 조각을 종묘 북쪽 계단에 매안하였다.
영숭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