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

목차
관련 정보
서울 문묘 대성전 정면
서울 문묘 대성전 정면
유교
개념
공자를 정위 좌우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 위패를 봉안해 성균관과 향교에 건치한 묘우(廟宇).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공자를 정위 좌우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 위패를 봉안해 성균관과 향교에 건치한 묘우(廟宇).
내용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를 배향(配享)하고 공문10철(孔門十哲) 및 송조6현(宋朝六賢)과 우리 나라의 신라·고려·조선조의 명현 18현(十八賢)을 종사(從祀)해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향교에 건치(建置)하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과 공문10철, 송조6현을 대성전(大成殿)의 좌우에 배열, 배향하고, 동무(東廡)에 중국 명현 47위(位)와 우리 나라의 명현 9위를 종사하고, 서무(西廡)에 역시 중국 명현 47위와 우리 나라의 명현 9위를 종사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1949년 전국유림대회 결의에 의해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位板)을 매안(埋安)하고, 우리 나라의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승당(陞堂)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 문묘의 건치는 714년(성덕왕 13)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문선왕(文宣王:孔子)과 10철, 72제자의 화상(畫像)을 가지고 와서 왕명에 의해 국학(國學)에 두면서부터이다. 그 뒤 승출(陞黜)을 거듭해 조선조 말에 이르러서는 공자 이하 133위를 모시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유현(儒賢)은 모두 18위인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1020년(현종 11)에 종사되었다. 1022년 설총(薛聰)이 종사되었으며, 1319년(충숙왕 6) 안유(安裕)가 종사된 뒤 고려의 정몽주(鄭夢周) 이하 15위는 조선조의 태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의 사이에 종사하게 되었다.

현재 보존된 성균관의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해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의 구도 내용은 대성전을 정전(正殿)으로 하고, 하단에 동무·서무·제기고(祭器庫)·묘정비각(廟庭碑閣)·신삼문(神三門)·동삼문(東三門)·동서협문(東西夾門)·소문(小門)·수복청(守僕廳)·전사청(典祀廳)·포주(庖廚)·악기고(樂器庫)·차장고(遮帳庫)·악생청(樂生廳)·향관청(享官廳)·동서월랑(東西月廊)·수자간(水刺間)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중앙문묘(中央文廟)인 대설위(大設位)의 제도이나, 각 지방 향교에 건치한 문묘는 그 고을의 크기에 따라 중설위(中設位)와 소설위(小設位)로 구분되어 그 제도가 각각 다르다.

문묘의 대성전은 다른 사묘처럼 단독으로 건축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이었던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해 지방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문묘제향을 통한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을 통한 교학(敎學)의 두 기능에 맞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강당인 명륜당, 동재·서재 등 다른 건물과 함께 건축된다는 점에 다른 사묘와 다르다.

고려시대의 문묘건축에 대해서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대문에 국자감(國子監)이라는 현판을 걸고,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건축하고, 또 양무(兩廡)와 재사(齋舍)들을 건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성전은 바로 조선시대 성균관의 문묘 대성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묘 건축의 배치는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중앙 중심축 북쪽으로 문선왕전인 대성전이 자리잡고, 그 전면 좌우에 동무·서무의 양무를 건립한다. 외삼문부터 대성전 기단의 앞면 계단까지는 신도(神道)를 둔다.

대성전의 평면은 일반적으로 장방형이나, 칸수는 일정하지 않다. 보통 앞면에는 퇴(退)를 두어 개방하고 있다. 예컨대, 서울의 문묘나 강릉향교 대성전에서는 앞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었으나, 경주향교의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모두 문짝을 달았다.

동무와 서무의 평면은 측면이 1, 2칸이나 정면은 여러 칸 되는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성균관의 동무·서무는 정면 11칸, 측면 1칸반으로 앞면 반칸을 퇴로 개방하고 있다. 그 내부는 모두 통간(通間)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전주향교에서처럼 일부 칸을 막아 경판(經板) 등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으나, 경판들은 존경각(尊經閣)에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원칙이 되어 있다.

문묘 대성전의 구조는 모두 목조가구식 건축(木造架構式建築)으로 포작계(包作系)이며, 주심포(柱心包)·다포(多包)·익공(翼工) 세 양식이 고루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성균관 대성전은 다포 양식이고, 강릉향교 대성전은 주심포 양식이며, 전주향교 대성전은 초익공 양식(初翼工樣式)임을 볼 수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 두 가지로, 성균관 대성전은 팔작지붕, 강릉향교 대성전은 맞배지붕이다. 동무와 서무는 일반적으로 민도리집 계통이나 때로 익공 양식으로 건축되기도 하는데, 모두 맞배지붕을 이룬다. 예컨대, 성균관의 동무·서무는 민도리집 구조로 맞배지붕이나 진주와 밀양항교의 동·서 양무는 익공 식으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묘 건축의 특성은 존현의 중심기능인 제사를 위한 의식 공간(儀式空間)이기 때문에, 하나의 축(軸)을 중심으로 대성전과 동·서 양무를 좌우 대칭되게 배치하게 된다. 더욱이, 대성전 앞 동·서 양무는 배치뿐만 아니라 입면상(立面上)으로도 좌우 대칭되게 한다.

교학 공간과 관련해서 존현 공간인 문묘를 공간적으로 우위에 놓는 것도 특징이다. 이 밖에 다른 특성으로 건축평면에서는 동·서 양무 모두 내부를 통간으로 하며, 건축구조에 있어서는 대성전의 구조가 다른 건축물, 즉 동·서 양무와 강당, 동·서 양재, 고직사 등보다 우위에 두어 기단도 가장 높고, 또 포작계로 건립된다.

참고문헌

『태학지(太學志)』
『문헌비고』
『조선고적도보』 11(조선총독부, 1931)
『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전국향교현황조사」(임한영 외, 『성균관대학교논문집』 17, 1972)
『한국문화사대계』 10(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78)
『한국건축미』(주남철, 일지사, 198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