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판중군병마사·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1148년(의종 2)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어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과 함께 내시(內侍) 김거공(金巨公) 및 환관(宦官) 지숙(之淑) 등 7명을 탄핵하였다. 처음에 의종(毅宗)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대궐 문 앞에 3일 동안 엎드려 간쟁하니 의종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최윤의는 그 뒤에 곧바로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을 맡아서 시부(詩賦)로 양충찬(梁忠贊) 등 11명을, 십운시(十韻詩)로 박유시(朴有時) 등 80명을 선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1151년(의종 5)에는 지대사(知臺事)로 있다가 5월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랐는데, 그가 직접 지은 부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때 지제고(知制誥)도 맡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를 지내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태부(太傅)에 임명되었고, 1153년(의종 7)에는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예부상서(禮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와 태자태부(大子大傅)를 겸하다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1154년(의종 8)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동지공거 김존중(金存中)과 함께 황보탁(皇甫倬) 등을 진사(進士)로 선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郎)·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와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를 겸하다가 권판상서병부사(權判尙書兵部事)를 맡았으며 다시 동북면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와 판중군병마사(判中軍兵馬事)를 겸하였다.
1156년(의종 10)에는 수태위(守太尉)·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가 되었으며, 1157년(의종 11)에 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이해에 의종이 환관인 정함(鄭諴)의 고신(告身)에 서명하도록 독촉하는 것을 재신(宰臣)과 간관(諫官)들이 모두 불가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평장사로 있던 최윤의는 우간의(右諫議) 최응청(崔應淸) 등과 함께 부득이하게 서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죽은 뒤인 1171년(명종 1)에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게 된 요인으로 작용되어 그의 자손들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1161년(의종 15)에는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고, 1162년(의종 16)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이계원(李繼元) 등 진사(進士) 29명과 명경업(明經業) 3명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이해 8월에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벌열(閥閱) 출신으로서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들을 역임했지만 일 처리가 명백하였다. 관리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니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였다는 평가를 들었고, 한 차례의 성균시와 두 차례의 과거를 관장할 때도 매번 적합한 사람[其人]을 얻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단행본
- 김철웅, 『한국중세의 길례와 잡사』 (경인문화사, 2007)
- 김해영, 『조선초기 제사전례 연구』 (집문당, 2003)
논문
- 김당택, 「『상정고금례문』의 편찬 시기와 그 의도」 (『호남문화연구』 21,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92)
- 김철웅,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와 내용」 (『동양학』 33,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03)
- 최봉준, 「고려 의종대 다원적 사상지형과 『편년통록』·『상정고금례』 편찬」 (『한국사학사학보』 44, 한국사학사학회, 202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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