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의 제18대(재위: 1146년~1170년) 왕.
이칭
일승(日升)
시호
장효(莊孝)
이칭
현(晛), 철(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127년(인종 5)
사망 연도
1173년(명종 3)
본관
개성
출생지
개성
주요 관직
고려 제18대 왕
내용 요약

의종은 고려전기 제1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46~1170년이며 인종의 맏아들이다. 1170년 서경에서 신령을 반포하여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유교적 정치이념보다는 불교·음양설·선풍 등을 중요시하여 문신세력들의 심한 제약 속에 구체적인 성과를 낳지 못했다.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무신정변을 발생시켰다. 1170년 정중부 등의 정변으로 폐위되어 거제현에 유배되었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이의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의
고려의 제18대(재위: 1146년~1170년) 왕.
개설

재위 1146∼1170. 이름은 왕현(王晛), 초명은 왕철(王徹). 자는 일승(日升). 인종(仁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이다.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장경왕후(莊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참정(參政)을 지낸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134년(인종 12)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1170년에 서경에 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정하는 것은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함이며, 이에 옛 성인들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받들어 현재의 민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을 채택해 반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교 · 음양설 · 선풍(仙風)을 중요시하였을 뿐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 정치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유교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둥했을 때에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아우인 익양공 왕호(翼陽公 王晧)가 즉위하니, 곧 명종이다.

그 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의 거병으로 계림(鷄林: 현재 경상북도 경주)에서 복위되기를 기다렸으나 거병이 실패하자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의의와 평가

의종(毅宗)이 즉위할 당시 고려왕실의 권위는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의는 금(金)나라가 인종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대륙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자연스럽게 고려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과거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 등으로 왕권이 실추된 이래, 이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 더욱 더 쇠약해졌다. 묘청의 난으로 인한 서경(西京) 세력(勢力)의 몰락은 고려 왕실을 지원하던 유력한 세력기반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즉위 초부터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들에게 심한 제약을 받았고,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인해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재위 중 거둥이 잦았던 것도 놀이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주된 이유로 생각된다. 그리고 천성이 나약하고 섬세하긴 했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격구(擊毬: 말을 타고 채로 공을 치던 경기)와 음률(音律)에 능했으며 시문(詩文)에도 탁월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은 분명해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148년에 현릉(顯陵: 태조의 능) · 창릉(昌陵: 세조의 능) 등을 참배했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중창하고 1158년에는 백주(白州: 현재 황해도 연백지역)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한 것에서도 의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남겼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이라는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처를 옮겨 다니며 놀이로써 시름을 잊었고 문신들에게는 자기과시를 하였다. 결국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 · 갈등은 정치 ·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무신정변(武臣政變)을 발생시켰다.

상훈과 추모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사』(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한국사: 중세편』(이병도, 을유문화사, 1959)
「고려 의종대의 활동」(하현강, 『동방학지』26,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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