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毅宗)은 1170년(의종 24) 무신난(武臣亂)으로 폐위되어 거제현으로 추방되었다가 1173년(명종 3)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경주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 위에서 47세의 나이로 시해되었다. 이때 의종에 대한 공식적인 국장(國葬)을 치르지 않아 경주의 전(前)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을 비롯한 이들이 몰래 널〔棺〕을 갖추어 연못가에 매장하였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 정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 이의방(李義方)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를 지내지 않은 죄’를 언급하면서 무신정권의 타도를 외쳤다.
이에 1175년(명종 5) 5월 병신일에 명종(明宗)은 의종의 사후 1년 7개월이 지나 국장을 선포하고 백관이 사흘 동안 검은 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임인일에 내시(內侍) 10인으로 하여금 의종의 시신을 호송케 하여 발상(發喪)한 지 7일째 되는 날에 개성(開城) 동쪽에 안장하였으며 능호(陵號)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여기에는 의종의 비(妃) 장경왕후(莊敬王后)가 함께 묻혔는데, 그녀는 1170년(의종 24) 무신의 난 당시 사망하여, 의종이 폐위되어 거제현으로 추방될 때 함께 가지 못하였고, 아들인 태자(太子)가 진도(珍島)로 추방되어 태후(太后)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의종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처음에는 개성시 곡령리 해안동 봉명산에 있는 해안사(海安寺)였는데, 이후 개성 동쪽에 있는 오미원(吳彌院)을 선효사(宣孝寺)로 개칭(改稱)하고 의종의 영정을 그곳으로 옮겼다.
고려 당시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고, 왕릉은 위숙군(圍宿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의종 희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조선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태조 현릉(顯陵), 현종(顯宗) 선릉(宣陵), 문종(文宗) 경릉(景陵), 원종(元宗) 소릉(韶陵)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인 개성부(開城府)의 수령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대다수 왕릉은 그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으나, 여기에 의종 희릉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순조(純祖)가 1818년(순조 18)에 고려 왕릉의 능주(陵主)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에 표석(表石)을 세울 때나, 고종(高宗)이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 57기를 조사하고 표석을 세울 때에도 의종의 희릉은 확인되지 않는다.
희릉을 개성 동쪽에 조영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므로, 묘제(墓制)와 널방의 구조 및 상설(詳說) 등을 파악할 수 없다.
의종의 희릉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의종이 폐위되고 시해된 지 1년 7개월 뒤에야 국상(國喪)을 치르면서 복상 기간을 축소하고 격식을 낮추어 조영된 왕릉이다. 이후 왕권이 약해져 왕릉은 온전한 모습으로 조영되거나 보존, 관리되기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