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정의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
건립경위
형태와 특징
병풍석에서 밖으로 100㎝ 지점에 그와 병행하여 능의 주위를 따라 12각형으로 난간석(欄干石)을 돌렸다. 역시 모가 죽은 방형(方形)의 돌을 깎아서 기둥을 만들어 12각의 매 모서리마다 세우고 그 가운데 동자석주(童子石柱)를 놓고 난간 가로대를 걸쳐 놓았다. 그런데 현재 난간 기둥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5개만 남아 있으며, 지면에 드러난 높이는 40㎝ 정도이다.
1963년 조사 당시에는 석수(石獸) 3기가 있었는데, 동쪽 뒤의 것은 잔등만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몰되어 있었다. 석수의 앉은 자세나 꼬리 부분에 조각의 흔적이 엿보여 석사자(石獅子)로 여겨진다. 봉분 앞 상석(床石)은 넓지만 거친 잡석을 한 장 놓았고, 상석 앞에는 난간석주(欄干石柱) 1개가 서 있는데, 1963년 이전 보수할 당시에 잘못 배치된 것이다. 동서 양켠에는 8각 돌기둥 형태로 된 망주석(望柱石) 1쌍이 마주 서 있다.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묘표석(墓表石)이 서 있다.
제2층 단의 동서 양켠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마주보며 서 있는데, 심하게 훼손되었고 인위적으로 파손된 부분도 있다. 높이는 212㎝이고, 얼굴 너비는 36.5㎝이며, 얼굴 두께는 40㎝이다.
제3층 단에도 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상에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동쪽에 있는 문인석의 높이는 199㎝이고, 얼굴 너비는 35㎝이며, 얼굴 두께는 34㎝이다. 1963년 조사 당시 문인석 1쌍이 제3층 단이 아닌 제4층 단에 위치해 있어서 제3층 단이 비어 있었다. 또 1쌍의 문인석은 서로 마주보지 않고 동쪽 문인석이 남향하여 있었다. 이밖에도 고려 왕릉의 기본 구조에서 벗어난 것이 많은데, 현재는 바로잡혀져 있다. 아래쪽 제4층 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있는데, 1963년에는 초석(礎石) 2개와 기와 파편이 남아 있었다.
변천
1508년(중종 3)에도 현종 선릉에는 묘지기 2호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534년(중종 29)이 되면 초목이 무성하여 고총(古塚)이 많아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覺)』을 참고하였지만 비석이 있는 태조 현릉 외에 현종의 선릉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였고 1710년(숙종 36)까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다. 특히 현종과 문종 및 원종의 경우 숭의전(崇義殿)에 함께 모셔져 있어 이들 왕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에 대한 소재 파악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을 살펴 30여 개의 왕릉은 100보를 정하여 금표(禁標)를 하고 경작과 장례를 금하였다. 이때 현종의 선릉에는 50보를 더하여 150보를 한도로 금표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후 3년마다 1회씩 고려 왕릉의 상태를 간심하여 보고하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와 고종(高宗) 때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지속되었다. 1867년(고종 4) 57기의 고려 왕릉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태조 현릉에 세워놓은 고려현릉수개기실비(高麗顯陵修改記實碑)에서 확인된다.
1916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867년의 표석을 근거로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기록하였다. 해방 후 1963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는 현종 선릉의 실태를 조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단행본
- 조선총독부, 『조선고적조사보고』(1916)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특별시사-고적편-』(1963)
- 장경희, 『고려 왕릉』(예맥, 2008)
논문
- 장호수, 「개성지역 고려왕릉」(『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2000)
-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호,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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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고려 시대 개경의 궁궐 안에 있던 정전(正殿). 인종 16년(1138)에 강안전(康安殿)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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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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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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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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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흙을 쌓아 올림. 또는 그 흙.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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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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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지대나 축대 등의 귀퉁이에 쌓는 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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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 붉은빛의 비단으로 만들며, 소매가 넓고 깃이 곧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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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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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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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능(陵)이 있는 구역.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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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대개 같은 모양의 관복을 입고 머리만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데, 능이나 묘의 둘레돌에 조각되거나 관이 들어 있는 방의 내부에 벽화로 그려져 분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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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3
: 오래된 무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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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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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5
: 자세히 보아 살피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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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6
: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흙을 쌓아 올리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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