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는 3기의 고려 왕릉이 연달아 위치하여 선릉떼라 불린다. 선릉떼의 3기 왕릉 중 규모나 체제로 미루어 볼 때 현종(顯宗) 선릉(宣陵)으로 여겨지는 ‘선릉떼 1릉’은 북한의 보존급 유적 제5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제8대 임금 현종은 1031년(현종 22) 5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여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선릉은 낮은 구릉의 중턱에 남향으로 위치하였고, 영역은 980㎡(약 300평) 정도이다. 능역(陵域)은 능(陵) 앞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린 산기슭을 다듬어서 장축을 동서로 하는 장방형(長方形)의 4층 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제1층 단의 중심 부위에 봉분(封墳)이 자리 잡고 있다. 봉분은 먼저 병풍석(屛風石)을 12각으로 축조한 위에 조성하였고, 봉토(封土)의 높이는 225㎝, 직경은 900㎝이다. 병풍석은 지대석(址臺石) · 만석(滿石) · 면석(面石) · 우석(隅石) · 인석(引石) 등으로 구성되었고, 지대석은 매몰되어 있다. 면석에는 십이지 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고, 머리는 짐승의 얼굴을 하고 조복(朝服)을 입었으며 홀을 쥔 모습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인석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조각들의 대부분은 마멸되어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다. 지면에 드러난 병풍석의 면돌 높이는 26.5㎝이고, 두께는 25㎝이다. 만석의 높이는 23.5㎝이다. 병풍석 한 변의 길이는 230㎝이다. 현재 병풍석의 일부 구간은 1963년 이전에 보수할 때 잡석으로 보충했던 것 같다.
병풍석에서 밖으로 100㎝ 지점에 그와 병행하여 능의 주위를 따라 12각형으로 난간석(欄干石)을 돌렸다. 역시 모가 죽은 방형(方形)의 돌을 깎아서 기둥을 만들어 12각의 매 모서리마다 세우고 그 가운데 동자석주(童子石柱)를 놓고 난간 가로대를 걸쳐 놓았다. 그런데 현재 난간 기둥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5개만 남아 있으며, 지면에 드러난 높이는 40㎝ 정도이다.
1963년 조사 당시에는 석수(石獸) 3기가 있었는데, 동쪽 뒤의 것은 잔등만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몰되어 있었다. 석수의 앉은 자세나 꼬리 부분에 조각의 흔적이 엿보여 석사자(石獅子)로 여겨진다. 봉분 앞 상석(床石)은 넓지만 거친 잡석을 한 장 놓았고, 상석 앞에는 난간석주(欄干石柱) 1개가 서 있는데, 1963년 이전 보수할 당시에 잘못 배치된 것이다. 동서 양켠에는 8각 돌기둥 형태로 된 망주석(望柱石) 1쌍이 마주 서 있다.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묘표석(墓表石)이 서 있다.
제2층 단의 동서 양켠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마주보며 서 있는데, 심하게 훼손되었고 인위적으로 파손된 부분도 있다. 높이는 212㎝이고, 얼굴 너비는 36.5㎝이며, 얼굴 두께는 40㎝이다.
제3층 단에도 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상에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동쪽에 있는 문인석의 높이는 199㎝이고, 얼굴 너비는 35㎝이며, 얼굴 두께는 34㎝이다. 1963년 조사 당시 문인석 1쌍이 제3층 단이 아닌 제4층 단에 위치해 있어서 제3층 단이 비어 있었다. 또 1쌍의 문인석은 서로 마주보지 않고 동쪽 문인석이 남향하여 있었다. 이밖에도 고려 왕릉의 기본 구조에서 벗어난 것이 많은데, 현재는 바로잡혀져 있다. 아래쪽 제4층 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있는데, 1963년에는 초석(礎石) 2개와 기와 파편이 남아 있었다.
고려 당시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고, 왕릉은 위숙군(圍宿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현종 선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조선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왕릉에 수호인(守護人)을 두도록 하여, 1406년(태종 6) 고려의 태조(太祖),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 충경왕(忠敬王)), 충렬왕(忠烈王) 및 공민왕(恭愍王)의 8왕이 묻힌 왕릉에 수호인을 두도록 하였다. 이때 현종의 선릉에는 묘지기 2호(戶)를 두고 매호에 전지 1결(結)을 주고, 부근에서 나무를 하거나 나물을 캐는 것과 불을 놓는 것을 금지하였다. 1432년(세종 14)에는 태조 현릉(顯陵)을 비롯하여 현종 선릉, 문종 경릉(景陵), 원종 소릉(韶陵)에만 수호인을 두고 경작이나 땔나무 베는 것을 금지토록 하였고, 나머지는 개성(開城)이나 강화도 소재지 수령이 관리케 하였다. 1456년(세조 2)에 현종 선릉은 수호하는 자 2호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법제화하여 고려의 태조 이하 4위(현종, 문종, 원종)의 왕릉은 그 지방의 고을 수령이 해마다 돌보는 동시에 밭을 일구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관리 제도를 수록하였다.
1508년(중종 3)에도 현종 선릉에는 묘지기 2호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534년(중종 29)이 되면 초목이 무성하여 고총(古塚)이 많아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覺)』을 참고하였지만 비석이 있는 태조 현릉 외에 현종의 선릉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였고 1710년(숙종 36)까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다. 특히 현종과 문종 및 원종의 경우 숭의전(崇義殿)에 함께 모셔져 있어 이들 왕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에 대한 소재 파악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을 살펴 30여 개의 왕릉은 100보를 정하여 금표(禁標)를 하고 경작과 장례를 금하였다. 이때 현종의 선릉에는 50보를 더하여 150보를 한도로 금표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후 3년마다 1회씩 고려 왕릉의 상태를 간심하여 보고하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와 고종(高宗) 때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지속되었다. 1867년(고종 4) 57기의 고려 왕릉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태조 현릉에 세워놓은 고려현릉수개기실비(高麗顯陵修改記實碑)에서 확인된다.
1916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867년의 표석을 근거로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기록하였다. 해방 후 1963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는 현종 선릉의 실태를 조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종 선릉은 고려가 망한 이후 조선 초기 국왕들이 관심을 갖고 수호군(守護軍) 2호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이미 중종(中宗) 대에는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62년(현종 3)에 위치를 고증하여 표석을 세워 그 위치를 표시하였고, 1867년에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현재 선릉에 해당되는 위치에는 3기의 왕릉이 연달아 위치하고 있어 북한에서는 이곳을 선릉떼라 부른다. 3기 중 ‘선릉떼 1릉’의 규모가 크고 능제도 잘 남아 있어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특히 병풍석이나 석수 및 문인석 등 석물이 고려 전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양식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