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고려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18~943년이다. 이름은 왕건으로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시중이 되었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열고 국호를 고려라 했다. 문란해진 토지제도와 조세경감으로 민심을 수습했으며 호족들과는 정략결혼으로 연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화정책을 펴는 한편 후백제의 우월한 군사력에는 화전양면 전술로 대응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불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장려했고 왕실의 헌장으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재위 918년∼943년.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 · 충주 · 청주(靑州) 및 당성(唐城) · 괴양(槐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湌)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때 궁예는 금성군을 나주(羅州)로 개명하였다.
또한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湌)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 배현경(裵玄慶) · 신숭겸(申崇謙) ·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조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환선길(桓宣吉) · 이흔암(伊昕巖)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 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궁예나 견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 후백제 · 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이 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 · 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으며, 같은 해 10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