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

논산 전 견훤 묘 정면
논산 전 견훤 묘 정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때,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67년(경문왕 7)
사망 연도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 신검 2)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견훤은 남북국시대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이다. 재위 기간은 892년~935년이며, 신라 서남해안의 변방비장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진성여왕 때 각 지역의 호족들이 지방을 점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는 사태에 이르자,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후삼국 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왕위계승 다툼이 일어나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가 도망쳐 왕건에게 의탁하다가 936년에 사망했다. 특정한 지역기반이 없었고 혼란기를 해소할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단명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의
남북국시대 때,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
개설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 용개(龍蓋) · 보개(寶蓋) ·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자랄수록 남달리 체모가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해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해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 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이르러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2000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 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 순행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왕이라 칭했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이듬 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하자, 보기(步騎) 3,000인을 거느리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 뒤 왕건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일길찬(一吉飡) 민극(閔郤)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때 고려와 후백제는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20년(경명왕 4) 보기 1만 인으로 대야성을 쳐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청도)으로 옮겼다. 이에 신라 경명왕은 김율(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안동, 혹은 상주 부근)을 공격했으나, 성중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왕건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지고 말았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문경)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 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건도 공산(公山)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를 공격하여 300여 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 지금의 군위)을 공격해 1,000여 인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막강했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8,000여 인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면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해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전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말 300여 필을 노획했다. 934년에는 운주(運州)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아들 10여 인을 두었는데, 그 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 · 양검(良劍) · 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냈다. 양검을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을 시켜 사람을 강주 · 무주 등으로 보내 음모를 꾸몄다.

935년 3월 금강은 죽고 견훤은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 해 6월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식읍으로 양주를 주었다. 그 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신검 · 양검 · 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했으나, 얼마 뒤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싸여 지내다가 드디어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역사적 평가

정치가로서 견훤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듬해에는 오월(吳越)과 통했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 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게 하였다. 또 922년과 929년 2차례에 걸쳐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했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해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한 것이다. 또한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를 건국한 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했기 때문에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정청주, 일조각, 1996)
『후백제 견훤정권 연구』(신호철, 일조각, 1993)
「견훤설화 재고」(정상진, 『도남학보』15, 1996)
「후백제 견훤연구」(신호철, 『백제논총』1,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5)
「후백제 금강에 관하여」(박한설, 『대구사학』7·8합집, 1973)
「견훤의 가향에 대하여」(김상기, 『이병기기념논문집』1966: 『동방사논총』, 1974)
「후삼국시대 지배세력의 성격에 대하여」(김철준, 『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 1964: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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