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924∼927.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 懿成 · 孝資王后)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義父)라 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라고도 한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