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 역사
  • 인물
  • 남북국
통일신라의 제54대(재위: 917년~924년) 왕.
이칭
  • 시호경명(景明)
인물/전통 인물
  • 사망 연도924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미상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두진 (국민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11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통일신라의 제54대(재위: 917년~924년) 왕.

개설

재위 917∼924.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 懿成 ·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

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신라 왕실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했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 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해 왕건(王建)을 추대하는 대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패권 다툼이 가장 치열한 곳은 지금의 안동이나 합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

919년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또한,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이면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8년 만에 승하하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이 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 - 『삼국사기』

  • - 『삼국유사』

  • - 『고려사』

  • - 『고려사절요』

  • - 「新羅三代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 - 「신라말 박씨왕의 등장과 그 정치적 성격」(조범환, 『역사학보』129, 1991)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