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917∼924.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 懿成 ·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
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신라 왕실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했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 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해 왕건(王建)을 추대하는 대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패권 다툼이 가장 치열한 곳은 지금의 안동이나 합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
919년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또한,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이면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8년 만에 승하하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이 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