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던 중 889년(진성여왕 3)에는 국내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국고가 비어 재정이 궁핍하였다.
이에 왕이 관리를 보내어 공부(貢賦)를 독촉하자 전국에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계기로 일어난 초적(草賊) 세력은 신라 조정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는데, 이때 기훤은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세력은 궁예와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891년 궁예(弓裔)는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왔는데, 기훤은 오만하여 그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울분에 싸인 궁예는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892년 북원(北原 : 지금의 경기도 원주)의 적괴 양길(梁吉)에게로 몸을 의탁하였다.
이처럼 기록에는 궁예가 기훤을 배반하고 양길의 부하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 기훤의 소홀한 대우로 말미암은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 당시 날뛰던 초적들의 상호항쟁에서 기훤이 약세를 보인 탓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기훤의 부하인 원회·신훤 등이 배반하여 떠남은 기훤의 세력이 붕괴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 뒤 죽주를 중심으로 한 기훤 세력의 몰락과정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때를 지나 멀지 않은 시기에 무너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