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득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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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때, 신라 태종무열왕의 서자로 총재를 역임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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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거득공은 삼국시대 신라 태종무열왕의 서자로 문무왕이 총재로 임명한 관리이다. ‘거득령공(車得令公)’ 또는 ‘차득공’이라고 한다. 총재에 임명된 후 강원도와 전라도를 순행하며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총재의 역할과 임명 시기 등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재상직에 왕의 친척이 임명되는 것은 신라 중대왕실의 전제정치와 관련된다. 또한 전라도 무진주의 주리(州吏) 안길(安吉)과의 일화는 지방의 향리가 교대로 서울에 거주하는 상수리제도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목차
정의
삼국시대 때, 신라 태종무열왕의 서자로 총재를 역임한 관리.
개설

일명 ‘거득령공(車得令公)’ 또는 ‘차득공’이라고 한다. 태종무열왕의 서자로 삼국통일 후 문무왕이 총재(冢宰)에 임명하자 먼저 국내를 밀행(密行)해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그가 서울(당시는 경주)을 출발해 아슬라주(阿瑟羅州: 何瑟羅州, 강원도 강릉시) · 우수주(牛首州: 강원도 춘천시) · 북원경(北原京: 강원도 원주시)을 지나 무진주(武珍州: 광주광역시)에 이르러 촌락을 순행할 때였다. 주리(州吏) 안길(安吉)이 그를 보고 보통사람이 아닌 줄 알아 자기 집으로 맞이해 극진히 대접하였다. 다음날 거득공은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나의 집을 찾아주면 좋겠다.”라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신라는 각주(各州)의 향리 한 사람씩으로 서울의 제조(諸曹)를 상수(上守)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마침 안길이 상수할 차례가 되어 서울에 올라와 거득공을 찾아갔다. 거득공은 그를 환대하면서 성부산(星浮山) 아래의 땅인 무진주의 상수소목전(上守燒木田)을 주었다. 그 곳은 30무(畝)로서 종자 3석을 뿌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거득공이 맡은 총재라는 직책이 어떤 관직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전국을 돌면서 백성들의 요역(徭役)이나 조세의 경중과 관리의 청탁(淸濁) 등 행정의 실무에 관련된 사항을 살피고 있는 점으로 보아, 집사부의 중시직(中侍職)이라는 설이 있다.

그가 재상으로 임명된 때도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다. 그에 관한 기록은 ≪ 삼국사기≫에는 전하지 않고, ≪ 삼국유사≫에만 태종무열왕의 서자로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 거득령공, 마득(馬得) 아간(阿干) 등이 나타난다.

그런데 문무왕대에 왕의 동생으로 시중에 임명된 자는 지경(智鏡)으로, 무열왕의 서자가 아니다. 그 밖에 문무왕 11년 시중에 임명된 예원(禮元)은 개원(愷元)의 잘못인 것으로 보아, 음이 비슷한 개원을 거득공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개원이 태종무열왕의 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한편, 7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는 재상제도(宰相制度)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것은 권력 집중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자리이다. 거득공이 받은 총재는 시중직과는 다른 재상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 당시 거득공이 정치의 실권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재상직에 왕의 친척인 거득공이 임명되는 것은 오히려 중대 왕실의 전제정치와 관련된다.

지방의 향리(鄕吏)가 교대로 서울에 와 거주하게 한 제도는 지방세력을 중앙에 얽어매게 하는 정책에서 생긴 것이어서, 중대 태종무열왕계의 전제정치에서 비롯되었음직하다. 그러다가 거득공이 재상이 된 뒤 안길이 서울에 상수함으로부터 이 제도는 강화되었다.

이 때에 상수리(上守吏)에게 상수리전(上守吏田)이 지급되었으며, 상수리들은 중앙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만큼 중앙에 더욱 예속되었다. 당시의 상수리제도를 고려의 기인제도(其人制度)로 연결시키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인제도는 향리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거주하게 하는 제도로서 고려 왕건(王建)의 호족연합책에서 나온 것이므로 향리 자신이 서울에 와 거주한 안길의 경우는 기인으로 볼 수 없게 된다. 곧 거득공은 상수리제를 강화한 것으로 된다. 기인제도가 신라 헌강왕 당시에 실시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은 동해의 용(龍)을 지방세력으로 보고 그 아들 처용(處容)이 기인으로 서울에 거주한 것으로 해석한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기인의 성격에 대한 고찰」(김성준, 『역사학보』 10·11, 1958·1959)
「신라집사부의 성립」(이기백, 『진단학보』 25·26·27합집, 1964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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