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년(진덕여왕 5)에 본래의 품주(稟主)를 개편해 설치하였다. 왕정(王政)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일을 하였다. 즉 위로는 왕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행정을 분장하는 여러 관부를 거느렸다.
집사부의 설치는 당시 신라 전제왕권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당시 왕권을 배경으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일파의 주장에 의한 것인 듯하다.
집사부의 중심은 장관인 중시(中侍 : 진덕여왕 5년 설치, 경덕왕 6년 侍中으로 고침)였는데, 정원은 1인이고, 진골(眞骨) 출신이 임명되었으며, 이찬(伊飡)에서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임기는 3년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차관직인 전대등(典大等 : 진흥왕 26년 설치, 경덕왕 6년 侍郎으로 고침)은 정원이 2인이고 아찬(阿飡)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제3등 관직인 대사(大舍 : 진평왕 11년 설치, 경덕왕 18년 郎中으로 고침)는 정원이 2인이고 나마에서 사지(舍知)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제4등 관직인 사지(신문왕 5년 설치, 경덕왕 18년 員外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 다시 사지라 함)는 정원이 2인이고 대사에서 사지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한편 말단 사무 담당자인 사(史 : 경덕왕이 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이 다시 사라 함)는 정원이 처음에는 14인이었는데 671년(문무왕 11)에 6인을 더했으며, 대사에서 선저지(先沮知, 일명 造位)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집사부는 829년(흥덕왕 4)에 집사성(執事省)으로 개칭되어 신라 멸망시까지 존속했으며, 관원조직은 집사부 때와 마찬가지였다. 시중은 전제왕권에 기생하던 종래의 정치적 성격에서 벗어나 집사성을 발판으로 점차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차관직인 시랑은 6두품(六頭品)의 활동무대였고 이를 발판으로 지배세력에 참여하려고 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