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

경주 신라 문무대왕릉 중 내부와 인공수로
경주 신라 문무대왕릉 중 내부와 인공수로
고대사
인물
통일신라의 제30대(재위: 661년~681년) 왕.
이칭
시호
문무(文武)
이칭
김법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81년
관련 사건
고구려 멸망|삼국통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무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61~681년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자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의 아들이다. 즉위 전부터 외교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 소탕에 주력했고 666년에는 당과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하여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감포 앞바다의 해중왕릉인 대왕암이 그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목차
정의
통일신라의 제30대(재위: 661년~681년) 왕.
개설

재위 661∼681.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활동사항

법민은 영특하고 총명해 지략(智略)이 많았다. 진덕여왕고구려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당(唐)나라까지 가서 외교 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태종무열왕 7)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해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해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에 옹산성(甕山城)우술성(雨述城)에 웅거하던 백제 잔적(殘賊)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그 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문무왕 3)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거물성(居勿城) · 사평성(沙平城) · 덕안성(德安城)의 백제 잔적을 정벌하였다.

이 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중심 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福信)과 승려인 도침(道琛)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周留城)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熊津城)을 공격해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任存城)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扶餘隆)과 화맹(和盟)을 맺었다.

한편,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金仁問) · 진주(眞珠)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해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던 소정방의 당군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자,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했으나 소정방은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한림(漢林)삼광(三光)을 당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해 667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新城) · 부여성(扶餘城) 등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해 쳐부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6월 김유신 · 김인문 · 김흠순(金欽純)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나라 진영에 파견해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寶臧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將士)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 묘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 유민(遺民)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水臨城) 사람으로 대형(大兄)검모잠(劍牟岑)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맞이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은 검모잠을 죽인 다음 4,000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金馬渚)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 운동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옛 백제 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맞아들인 것도, 고구려 부흥 운동과 연결해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웅진도독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편, 문무왕은 670년 품일(品日) · 문충(文忠)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격해 빼앗도록 했으며, 그 곳의 인민을 신라의 영토로 옮기고, 천존(天存) 등은 7성을, 군관(軍官)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竹旨) 등이 가림성(加林城)을 거쳐 석성(石城) 전투에서 당군 5,3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 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해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해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 척을 공격해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 온 당군과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이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해 침략해 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워야만 하였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침략해 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해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 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 장군 문훈(文訓)이 이를 격파해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000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이근행(李謹行)이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는데, 신라군이 매초성(買肖城)에서 크게 격파해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沙飡) 시득(施得)기벌포(伎伐浦)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와 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 체제의 정비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증가한 중앙 관부(官府)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다.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迊飡) 문왕(文王)을 비롯한 문훈 · 진복(眞福) · 지경(智鏡) · 예원(禮元) · 천광(天光) · 춘장(春長) ·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 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 지경 · 예원 등 자기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71년과 672년에 병부(兵部) · 창부(倉部) · 예부(禮部) · 사정부(司正府) 같은 중앙 관부의 말단 행정 담당자인 사(史)의 인원 수를 증가시켜 업무 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 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 대에 이미 소경(小京)을 설치한 중원(中原)에 성을 축조했으며, 통일 후인 678년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을,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어 왕경(王京)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小京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 신라 군사 조직의 기간은 신라 민과 피정복 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 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 해인 672년에 백제 민으로써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 해에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 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밖에 672년에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체제 정비 작업은 675년에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난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甘浦) 앞바다의 해중왕릉(海中王陵)인 대왕암(大王巖)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구려 대수·당항쟁과 여제의 붕멸」(이병도, 『한국사』-고대편-, 을유문화사, 1959)
「신라 집사부의 성립」(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무열왕권의 성립과 활동」(신형식, 『한국사논총』 2, 1977)
「신라중대의 관료제와 골품제」(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한국연구원, 1980)
「문무왕」(김수태, 『신라중대정치사연구』, 일조각, 1996)
「新羅幢停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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