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주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백제정벌군을 지휘한 장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62년
주요 관직
병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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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백제정벌군을 지휘한 장수.
생애 및 활동사항

통일전쟁기에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큰 업적을 남겼다. 639년(선덕여왕 8) 2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의 관등은 사찬(沙飡)이었다.

그 뒤 659년(무열왕 6) 8월에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곧이어 시작된 백제원정군을 지휘하였다. 즉, 660년 5월에 신라의 백제정벌군은 김유신을 최고지휘관으로 하여 그와 천존(天存)이 이를 보좌하였다.

원정군은 그해 6월에 남천정(南川停: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고, 7월에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을 격파하여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을 함락시켰다.

백제 멸망 뒤 661년(문무왕 1) 7월에 편성된 고구려정벌군에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662년 8월에 백제유민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흠순(欽純) 등 19인의 장군이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때 대당장군이던 그는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사칭하여 출병하지 않았으므로 국사(國事)를 게을리 하였다는 죄목으로 일족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의 뒤에는 문무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5년 9월에 당나라에서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공부하던 아들 풍훈(風訓)이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신라를 쳐들어온 일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숙위학생고(宿衛學生考)」(신형식, 『역사교육(歷史敎育)』 11·12,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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