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쟁기에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큰 업적을 남겼다. 639년(선덕여왕 8) 2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의 관등은 사찬(沙飡)이었다.
그 뒤 659년(무열왕 6) 8월에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곧이어 시작된 백제원정군을 지휘하였다. 즉, 660년 5월에 신라의 백제정벌군은 김유신을 최고지휘관으로 하여 그와 천존(天存)이 이를 보좌하였다.
원정군은 그해 6월에 남천정(南川停: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고, 7월에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을 격파하여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을 함락시켰다.
백제 멸망 뒤 661년(문무왕 1) 7월에 편성된 고구려정벌군에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662년 8월에 백제유민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흠순(欽純) 등 19인의 장군이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때 대당장군이던 그는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사칭하여 출병하지 않았으므로 국사(國事)를 게을리 하였다는 죄목으로 일족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의 뒤에는 문무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5년 9월에 당나라에서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공부하던 아들 풍훈(風訓)이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신라를 쳐들어온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