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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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라 김인문묘 발굴 모습
경주 신라 김인문묘 발굴 모습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고구려 평양성 함락 당시의 장수. 외교관.
이칭
인수(仁壽)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29년
사망 연도
694년
주요 관직
대당총관
관련 사건
평양성 함락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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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남북국시대 고구려 평양성 함락 당시의 장수. 외교관.
개설

자는 인수(仁壽).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유가서(儒家書)를 많이 읽었고, 장자·노자·부도(浮屠: 불교)의 책도 섭렵하였다. 특히 예서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향악(鄕樂)을 잘했다.

넓은 식견과 훌륭한 기예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힘썼고, 여생을 당나라에서 보내면서 양국간 정치적 분규의 해결과 중재에 많은 공을 세웠다.

활동사항

그가 태어난 7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안으로는 진평왕이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권 안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신라의 팽창에 대항하여 백제·고구려의 결속이 촉진되면서 이들의 신라 공격이 적극화되고 있어 국가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김춘추는 김유신계열과 결속하여 신흥세력을 이끌면서 선덕왕·진덕왕을 세워 구귀족의 반발을 무마시켜갔다. 특히, 642년(선덕여왕 11)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 함락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전기로 김춘추는 정치·외교 활동에 새로운 방향을 맞게 되었다.

특히 김춘추는 고구려원병에 실패하고 또 일본방문에서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꾀하게 되었다. 먼저 648년(진덕여왕 2)에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대동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원조의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김문왕을 숙위(宿衛)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신라와 당나라의 원활한 관계와 군사적 협조 등 여러 가지 문제해결에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651년에 김문왕과 교대하여 숙위로 파견되어 당나라 조정에 머물면서 양국간 현안문제에 있어 중개 임무를 맡게 되었다.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라는 직함으로 5년간 머물면서 백제정벌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협의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명목으로 한 번 귀국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따른 인사와 아울러 국내의 전략 점검을 위한 태종무열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숙위는 다시 김문왕으로 교대되었고, 귀국과 동시에 압독주(押督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장산성(獐山城)의 축조를 감독했는데, 이러한 군주생활이 유일한 국내 정치활동이었다. 따라서, 그의 군주 임명은 백제정벌의 군사작전 및 진격로의 최종 점검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58년 다시 당나라에 가서 660년 백제정벌의 당나라측 부사령관인 신구도행군 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서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을 도와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다.

백제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작전수행상의 이점이 있어 당군의 선봉을 이끌고 덕물도(德勿島: 지금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기벌포(伎伐浦: 지금의 장항)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뒤, 7월에 김유신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후 소정방이 의자왕, 태자 융(隆) 및 고관 93인과 1만 2,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가자, 김인문도 사찬(沙飡) 유돈(儒敦)·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과 함께 숙위를 계속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귀국하여 고구려 정벌의 시기와 방법 등을 통고했고, 이어 7월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임시군을 편성하여 진주(眞珠)·흠돌(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되었다.

8월에 김유신의 진두지휘하에 고구려 정벌을 떠나 평양 근교까지 이르렀으나 일기 불순과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당군이 퇴각했고, 신라군도 후퇴하였다. 이 때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1만여급을 목베는 대전과를 올려, 김유신과 더불어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전장(田庄)·노복을 받게 되었다.

662년 7월 제4차로 입당하여 고구려 정벌의 실패 요인을 검토하고, 우선 시급한 백제 잔적의 토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664년에는 납치해 갔던 백제의 왕자 융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 구귀족의 회유 및 포섭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된 융과 웅진에서 만나 천존(天存)·유인원(劉仁願)과 함께 화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의 고구려정벌을 보다 쉽게 하여, 그 해 7월 군관(軍官) 품일(品日)과 함께 일선(一善)과 한산(漢山)의 군대와 웅진성의 병마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꾀했을 때 그 첫번째 전과로서 돌사성(突沙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65년에 숙위하던 김문왕이 죽자,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을 따라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했으며, 그 때 우요위 대장군(右요衛大將軍)이 되었다. 666년에는 삼광(三光)·한림(漢林)과 숙위를 교체하고 귀국하여 이적(李勣)의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측이 협조할 사항을 전달하였다.

668년 6월 당나라 고종의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닿은 유인궤(劉仁軌)와 삼광을 맞아들여 최종적인 고구려 정벌 작전을 수립하였다. 이 때 흠순·천존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북진을 시작했으며, 김유신이 풍병(風病)으로 출정하지 못하자 신라군 사령관으로서 이적의 당군과 함께 9월에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적의 당군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 20여만 명과 함께 귀환할 때,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와 함께 다시 당나라에 갔다. 그 때 문무왕에게서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받고, 계속 숙위로 당나라에 머물면서 양국간 분쟁을 조정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목도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잔민을 앞세워 당군을 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배당운동(排唐運動)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대립은 671년의 설인귀(薛仁貴)의 항의문과 왕의 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674년 신라가 고구려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고토를 잠식하면서 노골적인 대당항쟁을 계속하자, 당나라는 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관으로 하여 쳐들어 왔다. 이에 왕이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자 김인문도 도중에서 돌아가 임해군(臨海君)으로 봉해졌다.

그 뒤 여생을 그 곳에서 보냈으며, 양국간의 정치적 분쟁도 거의 사라져 대우를 받았다. 679년 진군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에 전임되고,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군 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을 제수받았다.

694년(효소왕 3)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유해를 사례시 대의서령(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의 호송으로 본국으로 옮겼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다음 해서악(西岳)에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역사(海東繹史)』
「신라의 대당교섭상에 나타난 숙위에 대한 일고찰」(신형식, 『역사교육』9, 1966)
「김인문」(신형식, 『인물로 본 한국인』, 1973)
「무렬왕권의 성립과 활동」(신형식, 『한국사논총』2, 1977)
「비운의 신라유당사들」(권덕영, 『신라의 대외관계사연구』, 동국대학교신라문화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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