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순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장수.
이칭
이칭
김흠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주요 관직
대당총관
관련 사건
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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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장수.
생애 및 활동사항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이다. ‘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인덕과 신의가 깊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660년(태종무열왕 7) 6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품일(品日)과 함께 김유신을 도와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황산(黃山)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신라군은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이 때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 노릇을 하자면 충(忠)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자면 효(孝)만한 것이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니, 반굴은 곧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히 싸우다가 죽었다.

이어 품일의 아들 관창(官昌, 官狀)도 싸우다 죽자, 이를 본 신라 병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662년(문무왕 2) 8월 백제의 잔민이 내사지성(內斯只城: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19명의 장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663년 3월에는 천존(天存)과 함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을 공격해 빼앗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어 덕안성(德安城: 지금의 은진)을 쳐서 1,000여 명의 반민을 토벌하였다.

668년 6월 고구려 정벌 때 이미 각간(角干)에 올라 있던 그는 김인문(金仁問)·천존·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출정하였다. 그는 항상 형인 김유신을 도왔다.

고구려 정벌 이후, 신라는 부흥 운동을 꾀하는 백제·고구려의 잔민을 포섭, 회유하는 한편으로 대당 항쟁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669년에 그는 파진찬(波珍飡)인 양도와 같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갔다.

문무왕은 격앙된 양국간의 대립을 완화시키고자 그들을 파견한 것이었으나, 그가 당나라에서 어떠한 외교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670년 당나라에서 귀국했으며, 그 뒤의 기록은 없다. 그의 가문은 멸사 봉공의 희생 정신으로 일관되어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고대사의 신연구』(신형식, 일조각, 1984)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신형식, 『이화사학연구』13·14합집,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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