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전쟁 동안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 등을 도와 백제·고구려 및 그 잔민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660년(무열왕 7) 5월 나당 연합군 출정 당시 신라측 총사령관인 김유신의 부장으로 품일(品日)·흠춘(欽春)과 함께 참전해,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함락에 큰 공을 세워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다. 661년 2월 백제 잔민들이 사비성을 공격했을 때, 그는 대당장군(大幢將軍) 이찬(伊飡) 품일을 도와 문왕(文王)·충상(忠常)과 함께 그들을 진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습격을 받아 신라군이 대패하자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난 듯하다.
그 뒤 복직해 그 해 12월에 재편성된 고구려 정벌군의 요직을 맡았으며, 김유신을 도와 고립 상태에 빠진 당나라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해 주었다. 평양성 가까이 진격했던 그의 신라 선봉대가 당나라군의 철수로 갑자기 귀환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해상으로 선봉대를 철수시켰다. 662년(문무왕 2) 초에 재차 고구려 원정군이 편성되자 김유신을 도와 쌀 4,000석과 벼 22,000여 석이나 되는 군량미를 당나라군에게 공급해 주었으며, 퇴각시 고구려군을 격파해 1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668년 6월 고구려 정벌의 칙지(勅旨)를 가지고 온 유인궤(劉仁軌)와 김삼광(金三光)을 맞은 신라는 대대적인 원정군을 편성했는데, 그는 김인문·흠순(欽純)·천존(天存)·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개원(愷元)·흠돌(欽突)·죽지(竹旨)·품일 등과 함께 일선(一善) 등 7군과 한성주(漢城州)의 병마를 이끌고 북진을 개시하였다. 신라군은 이적(李勣)의 당나라군과 합세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669년 5월에 파진찬(波珍飡)이 된 그는 각간(角干)흠순과 함께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잔민을 조종, 흡수하면서 노골적인 대당 항쟁을 추진한 데 대한 당나라의 질책을 해명하기 위한 사절이었다.
당나라는 670년에 흠순을 돌려보내는 한편 그는 억류시켜 장안에서 옥사하게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강수열전(强首列傳) 끝에 나오는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 6명 속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이나 문장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