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죽만(竹曼)·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 대신을 역임한 술종(述宗)이 일찍이 삭주(朔州)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한 거사(居士)와 기이한 인연을 맺은 뒤 출생했다 하여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진골(眞骨) 귀족 출신으로 진평왕 말년경에 화랑으로 활약했는데, 그가 낭도 득오(得烏)를 부역노동에서 구해내기 위해 애를 써 화랑도 구성원간의 두터운 우애와 의협심을 잘 나타내주는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뒤에 장군이 되어 649년(진덕여왕 3) 대장군김유신(金庾信), 장군천존(天存) 등과 함께 신라 국경 안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크게 격파해 이름을 떨쳤다. 그 뒤 파진찬(波珍飡)에 올랐다가 651년 2월 새로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가 되어 655년(태종무열왕 2) 정월까지 국왕의 기밀사무를 맡았다.
백제 멸망 후 661년 4월에는 부흥운동을 꾀하던 백제 잔병(殘兵) 소탕전에 참전했고, 곧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 그해 7월 고구려 원정에 착수했을 때는 천존·천품(天品) 등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왔다. 이 때 김유신의 부장(副將)으로 각 전선을 전전하였다. 667년(문무왕 7) 가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 이듬해 6월 결전 때는 진순(陳純)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으로 평양성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다. 다시 670년 7월에 백제의 잔적 토벌에 참가, 천존 등과 함께 7성을 공취하고 2,000여 명을 죽였다.
그 뒤 당나라와의 전쟁에 종군, 이듬해 6월 백제 지역으로 쳐들어가 가림성(加林城)을 치고, 석성(石城 : 현재의 충청남도 임천)에서 당나라 군사와 결전, 당병 5,300여 명을 베고, 백제 유장(遺將) 2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 고급장교) 6명을 포로로 잡는 등 공을 세웠다. 효소왕 때 낭도였던 득오가 그를 사모해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