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 이온문(李溫文) · 허홍재(許洪材) · 서안정(徐安貞) · 박동계(朴東桂) · 이황중(李黃中) · 최우보(崔祐甫) ·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 · 간관(諫官: 諫議大夫 · 起居注)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현실 비판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 『삼한고기(三韓古記)』 · 『신라고사(新羅古史)』 ·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 · 『화랑세기(花郎世記)』 ·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진서(晉書)』 · 『위서(魏書)』 · 『송서(宋書)』 · 『남북사(南北史)』 · 『신당서(新唐書)』 ·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 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 ·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 가문과 윤관(尹瓘) 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이자겸(李資謙)의 충돌 등 문벌가문 간의 격심한 갈등이 겹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비리가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갈등이 국가멸망의 원인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후세에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 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 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 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 · 신하 ·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기 · 지 · 표 ·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본 기
중국사서는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본기는 신라 12권(통일신라 7권 포함), 고구려 10권, 그리고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
원래 본기는 주요 사실의 기록으로서 주로 왕의 치적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본기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 · 천재지변 · 전쟁 · 외교 등 4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일정한 비율로 증감되고 있다.
정치기사는 본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서, ① 축성(築城) · 설책(設柵) · 수궁실(修宮室) 등 대규모 인력 동원에 대한 기록, ② 민심수람과 국민의 결속을 강행하려는 순행(巡幸)의 기사, ③ 관리의 임면(任免)이나 관청의 설치에 관한 기록, ④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와 풍흉에 따른 종교적 관례에 관한 기사, ⑤ 기타의 내용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정치기사의 내용은 삼국의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축성과 궁궐 조성 기록은 백제가 가장 많아 일찍부터 대외전쟁에 시달렸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라는 관리의 임면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순조로운 왕권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둘째의 순행기사는 135회의 기록(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이 있으나 삼국의 양상은 각기 달랐다. 즉, 신라는 구휼과 군사상 필요를 비롯하여 권농 · 영토확인 · 수렵 · 구인(인재등용) 등을 목적으로 하는 순행이 많았고, 백제 · 고구려에서는 주로 수렵(군사훈련)이 목적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순행은 제사 · 구인 · 독려 · 지세파악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출행 시기(出幸時期)가 천재지변과는 큰 관계가 없는 1·2월에 집중되고 있으며, 백제 · 고구려는 1∼3세기에, 신라는 9세기에 빈번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왕권이 약할 때 왕이 지방출장을 많이 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셋째의 관리임면 기록은 태자 · 왕비의 책봉이나 관리의 임명 등으로, 왕권의 구체적 행사를 표시한다. 신라에서 제일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의 종교적 기능에 관한 기록은 시조 · 종묘에 대한 제사, 풍요의 기원 및 재난 예방에 대한 기원을 내용으로 하며, 백제가 가장 빈번히 나타난다. 천재지변기사는 930여 회의 자연변이의 기록이다. 이는 600여 회의 천재와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상응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천재에는 혜성 ·5성 · 유성 · 일식 등으로 대표되는 천변(天變)과 가뭄 · 홍수 · 벼락 등의 천재가 있으며, 지변에는 지진 · 화재 · 동물변이 · 수변(樹變) · 인변 등이 있다. 이러한 천재지변 중에서도 혜성 · 일식 · 지진 · 가뭄 · 용 등은 큰 영향을 주는 구징(咎徵)으로서, 특정 사건에 대한 예고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들은 사망 · 전쟁 · 모반 등을 예언하는 것으로 천재와 지변은 상호 연관성이 있어 그에 대응하는 대책이 요구되었다.
한편 정확한 천재지변의 기록은 고대과학의 발달을 가져와 일식(14.8년) · 가뭄(9.2년) · 지진(10.3년)등의 주기 산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쟁기사는 삼국이 존속한 10세기 동안에 일어난 28개국과의 440여 회에 걸친 전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삼국간에 일어난 경우와 외국과의 싸움으로 구별되는데, 고구려는 대외전을 주도하였고, 백제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시련을 받았다.
그러므로 백제는 국가 발전이 둔화되었고, 고구려는 백제 · 신라와의 싸움을 적게 치렀기 때문에 중국과의 항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끝으로, 외교기사는 연 34개국과 620여 회의 교섭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외교 기록은 거의가 조공(朝貢)으로 대표되는 한중 관계가 중심이 되지만, 중국측에서 온 기록도 상당히 많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외교는 정치적 안정과 짝한다는 사실로서, 장수왕과 후위(後魏), 성덕왕과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공이 중화 사상의 표시라고 하여도 결코 종속 관계는 아니었고, 삼국의 자아 의식은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외교관계 기록에는 조공이라는 광의의 개념 속에는 진하(進賀) · 사은(謝恩) · 인질(人質) · 구법(求法) · 숙위(宿衛) · 숙위학생 등 다양한 외교 사절과, 책봉(冊封) · 조위(弔慰) · 책망(責望) 등 중국측 사절도 포함되었다.
외교기사에서 특기할 사실은 16명의 숙위와 10여 명의 숙위학생들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독특한 외교적 존재였다.
(2) 지
『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 거기(車騎) · 기용(器用) · 옥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이다. 그리고 제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데, 중앙관부(7권), 궁정관부(8권), 무관과 외직(9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 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오행지에 중심을 둔 『한서(漢書)』나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唐書)』와 다른 점이다.
우선,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 되며, 악지는 악기 · 가악(歌樂) · 무(舞) · 악공(樂工)의 순서로 되어 있다. 복색조 · 기용조 · 옥사조에 나타난 금지 조항은 전국민을 하나의 법규 속에 묶어 국민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4두품과 평민에 대한 동일한 대우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지리지가 큰 비중으로 취급된 것은 일종의 영토 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직관지에서는 중앙행정관부에 있어서 14관부와 19전(典: 7寺成典 포함.)을 균형있게 배려하고 있으며 궁정관부가 110여 개가 넘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왕권 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보게 한다.
(3) 표
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 · 종실표(宗室表) · 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와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4) 열 전
열전 10권은 중국 문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 기준도 항목별(名臣 · 循吏 · 酷吏 · 儒林 · 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 · 공주 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중에서 김유신(金庾信) 개인 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어,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인물 나열이 핵심이 된다.
제1∼3권은 김유신전으로, 선조(武力^舒玄)와 후손(三光 · 允中 · 巖)의 업적을 강조하였고, 제4권은 을지문덕(乙支文德) · 거칠부(居柒夫) · 이사부(異斯夫) · 김인문(金仁問) · 김양(金陽) · 흑치상지(黑齒常之) · 장보고(張保皐) · 사다함(斯多含)의 전기이다.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 후직(后稷) · 밀우(密友) · 박제상(朴堤上) · 귀산(貴山) · 온달(溫達) 등 10인의 전기이다. 제6권은 강수(强首) · 최치원 · 설총(薛聰) · 김대문 등 학자의 열전이다.
특히, 최치원의 마한고구려설이나 백제의 해외 진출에 대한 견해는 설총의 『화왕계 花王戒』와 함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7권은 해론(奚論) · 관창(官昌) · 계백(階伯) 등 19인의 전기이다. 여기에서는 찬덕(讚德)과 해론, 심나(沈那)와 소나(素那), 반굴(盤屈)과 영윤(令胤), 비령자(丕寧子)와 거진(擧眞) 등 부자가 순국한 충의열사의 기록이 중심이 된다.
제8권은 향덕(向德) · 성각(聖覺) · 김생(金生) · 솔거(率居) · 도미(都彌) 등 11인의 전기이다. 특히, 효(향덕 · 성각) · 충의(劒君) · 기예(김생 · 솔거 · 百結) · 열녀(薛氏女 · 도미) · 효녀(知恩) 등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제9권은 창조리(創助利)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열전으로서, 왕을 시해한 반신(叛臣)의 기록이다. 제10권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열전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신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이다. 논찬이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 바, 『삼국사기』에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칙, 고구려본기에 7칙, 백제본기에 6칙, 열전에 8칙 등 모두 31칙의 논찬이 있다.
내용은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姓娶妻)나 혁거세의 왕후 동반 순행을 옹호한 점,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 곳 등에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는 신채호(申采浩)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 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改惡書)는 아니었다.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도 우리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 주도하의 관찬(官撰)이라는 역사 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 초의 역사 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 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첫째, 이 책은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말하자면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태조왕 · 고이왕 · 내물왕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전사관에 의해 역사 변천을 파악하여 신라 · 고려의 교체(交替)를 당위성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역사 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하늘의 변화[天災地變]와 인간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 내용을 추출시켰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왕의 정치 행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이 책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현실 비판을 특정한 과거의 사실인 백제 · 고구려 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 일파의 패배나 견훤 · 궁예의 멸망을 통일을 파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역사를 국민 교화와 계몽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넷째, 이 책은 강렬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대한 반론으로서 우리 나라 현실과 독자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서 엿볼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주의 사관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공적인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가치는 그것이 지니는 사료로서의 의미와 그 속에 반영된 역사 의식의 객관성과 자아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 자료의 인용이나 기타 자료의 내용으로 보아 광범한 자료 인용의 원칙 속에서 피휘법(避諱法)이나 결필법(缺筆法)을 적절히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전거에서 분주(分註) 문제와 고기(古記), 그리고 구삼국사기의 관련 속에서 이 책의 사서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현존하는 판본 중 중요한 것으로서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삼국사기 권44~50(보물, 1981년 지정)
권44∼50 1책. 목판본. 13세기 후기에 인간된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어 성암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현존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판에서 찍어낸 후쇄본(後刷本)이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고 잔존본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중종조 간본(刊本)의 오류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
50권 9책. 목판본. 1512년(중종 7)에 간행된 『삼국사기』 완질본이다. 명나라 무종(武宗),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판각된 삼국사기(국보, 2018-1 지정)와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계복이 중종 7년에 쓴 발문에 의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경주부(慶州府)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마멸되어 1행에 겨우 4, 5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경주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부임한 자신이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로부터 완본(完本)을 구하고 경상도 감사 안당(安瑭) 및 도사(都事) 박전(朴佺)과 의논하여 여러 읍에 나누어 새기게 한 다음 경주부에 돌려받았다 한다.
이 발문은 『삼국유사』에만 붙어 있으나, 여기에 『삼국사기』가 언급되어 있고 판본 또한 이 무렵의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간행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 판본에는 3종의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는데, 고려의 원각판(原刻板)으로 여겨지는 것과 1394년(태조 3)에 새긴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다.
권14 제1장 하반부와 권26 제2∼9장 하단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본문이 결실되어 있고, 어떤 것은 새김을 생략한 것도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중종조 간본 가운데 완질본으로 인쇄가 가장 선명하다. 1931년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1984년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영인하여 증수보주(增修補註)하여 학계에 제공하였다. 서울의 이병익이 소장하고 있다. 1981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3) 삼국사기(국보, 2018-1 지정)
50권 9책. 목판본.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것이다. 명나라 무종,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간행된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와 동일한 판본인데, 권수부분에 모필로 쓴 ‘萬曆元年月日玉山書院上(만력원년월일옥산서당)’이라는 기록이 있어 1573년 경주부에서 찍어내어 옥산서원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질본의 『삼국사기』이나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가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질본이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국보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