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도독부는 중국 수나라의 총관부(總管府)를 계승한 당나라의 관부로, 대·중·소 도독부의 구분이 있었다.
특히, 대도독부에는 도독 1인, 장사(長史) 1인, 사마(司馬) 2인,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2인, 녹사 2인, 전옥(典獄) 16인, 문사(問事) 10인, 일직(日直) 24인, 시령(市令) 1인, 승(丞) 1인, 좌(佐) 1인, 사(史) 12인, 창독(倉督) 2인의 관원과 경학박사(經學博士) 1인, 조교(助敎) 2인, 학생(學生) 60인, 그리고 의학박사 1인, 조교 1인, 학생 15인 등을 두고 교육에 임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뒤 그 고토를 확보, 지배하기 위해 한반도에 도독부를 두었다. 660년 9월 백제를 정벌한 직후, 당나라는 백제 고토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등 5도독부를 두고, 그 아래 주·현을 통괄하게 하였다.
아울러 백제 출신 추장으로 도독·자사(刺史)·현령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낭장 유인원(劉仁願)으로 도성을 지키게 하고, 좌위중낭장(左衛中郎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9월 28일 왕문도는 신라 무열왕에게 당나라의 조서를 전달하는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식전(式典)에서 급서하여 그의 종자가 대신 식을 마쳤다.
그 뒤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접수하고 당군에 대항하면서 노골적인 반당정책(反唐政策)을 추진하자, 당나라는 663년(문무왕 3)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원활하게 단행하고 신라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660년에 당으로 붙들어갔던 의자왕의 태자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은 뒤, 취리산(就利山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연미산)에서 백마를 희생시켜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