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백제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으로 활동하다가 뒤에 신라로 투항하여 활동하였다.
660년(의자왕 20)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명의 백제정벌군이 진격하여 오자, 계백(堦伯)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가 이들을 맞아 황산(黃山)에서 싸움을 벌일 때, 좌평의 관직으로 출전하였다가 결국에는 계백이 전사하고 백제군이 패하여 좌평 상영(常永) 등 30여 인과 함께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이들 백제인들에게 재능에 따라 관등과 관직을 주었는데, 그는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의 직책에 보임되었다. 뒤에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승진하여 백제부흥군의 정벌에 참가하였다.
661년(태종무열왕 8)에 백제부흥군이 이미 함락된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을 탈환하기 위하여 침공하여 오자,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한 토벌군에 문왕(文王)·양도(良圖) 등의 장군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치열한 반격에 부딪혀 패하고,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이에 대한 책임으로 논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