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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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경주 신라 법흥왕릉 정면
경주 신라 법흥왕릉 정면
고대사
인물
신라의 제23대(재위: 514년~540년) 왕.
이칭
법공(法空), 법운(法雲)
시호
법흥(法興)
이칭
모즉지매금왕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540년
관련 사건
율령 반포
내용 요약

법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14~540년이며, 지증왕의 아들로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체제를 완비한 왕이다. 먼저 병부를 설치, 군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한 후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완비했다. 상대등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했고, 가야를 합병하여 영토를 확장한 후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최초로 사용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공인하고 국가 형성의 이념적 지주로 활용했다. 말년에는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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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의 제23대(재위: 514년~540년) 왕.
활동사항

재위 514∼54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원종(原宗).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이다. 키가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

지증왕 때의 일련의 개혁 정치를 계승해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로서의 통치 체제를 완비하였다. 이 같은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517년(법흥왕 4)에 설치한 중앙 관부로서 병부(兵部)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 관부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해 왕의 직속하에 있으면서 군사권을 장악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 관부로 흡수해 재편성한 것이다.

520년(법흥왕 7)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 공복을 제정했는데, 이 때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 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율령에 의해 신라에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이 파악됨으로써 통치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법에 의한 이질적 요소의 강제적 해소로 상대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권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 대에 비로소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법흥왕 18)에 이찬(伊飡) 철부(哲夫)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대등이 설치된 배경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법흥왕 9)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했는데,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해 524년(법흥왕 11)에는 남쪽의 국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 때 본가야의 왕이 와서 법흥왕과 회견했는데,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본가야는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국(金官國)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밖에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군주(沙伐州軍主)로 임명해 서북 방면의 점령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 강화와 영역 확장 등에 힘입어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법흥왕 23)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후 신라 중고(中古) 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중국의 주변 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국가임을 자각한 자주 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법흥왕 8)에는 종래의 외교 노선에서 탈피해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것은 백제의 안내를 받고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 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또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래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

초기의 전도자(傳道者), 즉 신라 불교 개척자로서의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은 아도(阿道)였다. 그는 인도의 승려로서 묵호자(墨胡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민간의 전도에 힘썼다.

민간에 전파된 불교는 신라 귀족으로부터 동두이복(童頭異服) · 의론기궤(議論奇詭)의 사교로 비난받았으나, 신라와 중국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마침내 신라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고민하던 중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해 국가 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형성에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해,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 또는 法雲)이라 한 데에서 잘 나타난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율령고」(전봉덕, 『한국법제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68)
「신라병부령고」(신형식, 『역사학보』 61, 1974)
「상대등고」(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삼국시대 불교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이기백,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신라 중고기의 대중인식」(김영하, 『민족문화연구』 15,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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