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 ()

고대사
제도
신라시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귀족들의 회의(會議).
정의
신라시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귀족들의 회의(會議).
개설

우리나라의 역사책에는 보이지 않으나,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에는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과 의논해 결정한다. 이를 화백이라 했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으면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또 『수서(隋書)』 신라전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여러 관리를 모아 상세히 의논한 다음에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화백회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기록을 볼 때 화백회의는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는 중신회의로,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화백’이란 말의 본래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권18에는 이를 해석해 만주어 ‘혁백(赫伯, hebe)’이 ‘상의한다’는 뜻이므로, 화백과는 음과 뜻이 모두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화백ㆍ혁백의 음과 비슷한 말을 후세에 전혀 찾을 수 없어 이는 따르기 어려운 실정이다. 역시 이를 신라고유의 이두(吏讀)식 표기로 생각해, “여러 사람이 화합(和合)해 왕에게 아뢴다(建白)”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기원

화백회의의 기원은 멀리 선사시대 촌락(村落)을 단위로 하던 공동체생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씨족원들은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공동으로 처리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19세기 말까지 남아있던 도청(都廳)ㆍ공청(公廳)ㆍ모정(茅亭) 등 각 지역의 촌락민 공동집회소는 바로 그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제(遺制)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경주(慶州)의 여섯 마을이 결합해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해 주변의 진한(辰韓) 소국들을 병합해 갔다. 이 소국들의 지배층은 경주로 옮겨져서 부(部)를 구성, 조정에 참여하였다. 이에 국왕을 중심으로 여러 귀족들이 정치를 의논하는 회의체가 발생하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건국 직후 수도에 성(城)을 쌓고 궁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이곳에서 국사를 의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138년(일성이사금 5)에는 정사당(政事堂)을, 249년(점해이사금 3)에는 궁궐 남쪽에 남당(南堂)을 만들어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의논하였다.

당시 신라는 주위의 성읍(城邑)국가들을 병합해 가던 때였으므로, 정치(政治)ㆍ군사(軍事)ㆍ재정(財政)에 관한 업무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다만 정사당 혹은 남당이 제도적 완성을 본 것은 신라가 진한 지역의 10여 개 소국들을 완전히 정복한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356∼402) 때쯤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화백회의에 대한 연구에서 주로 다루어진 문제는 화백회의의 어의(語義)나 기원(起源), 화백회의가 열린 장소, 화백회의의 구성원 및 주재자(主宰者), 화백회의의 기능과 성격, 그 변천과정에 대한 것이다. 특히 화백회의는 신라 왕권의 성장 및 정치사 전반에 관련된 문제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는데, 전제왕권이나 부(部) 체제 논쟁은 가장 첨예한 부분이기도 하다. 전자에 있어서는 화백회의와 그 의장(議長)으로 간주되는 상대등(上大等)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분석이 전제정치를 이해하는 관건으로 여겨졌으며, 후자의 경우 부의 단위정치 체제적 성격의 통치체제를 국가발전단계인 중앙집권국가와 같은 범주에서 계열화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로 요약된다.

연구 초기에는 화백의 어의나 기원, 구성 및 기능 등 단편적인 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근래에는 신라 정치사회 발전과정과 관련한 부분에 중점이 맞추어지면서 화백과 남당을 비롯하여 대등(大等)ㆍ갈문왕(葛文王)ㆍ품주(稟主) 등과 관련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귀족회의의 성립ㆍ운영의 변천, 구성 및 상대등과 갈문왕의 성격과 역할 등을 다루면서 귀족회의 운영에서는 시기별 변화상이나 자료 해석의 문제 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신라 상고(上古) 말, 중고(中古) 초엽의 회의체를 보여주는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와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가 발견되면서 이 무렵 회의체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화백회의가 원시부족회의소에서 출발한 6부족장회의로부터 기원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즉 알천안상(閼川岸上)에서 6부족장과 그 자제들이 박혁거세를 추대한 기사를 화백회의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다만 신라 정치사회 발전과정 및 중국측 화백 관계 기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에 대해 군신회의(君臣會議), 귀족회의(貴族會議), 왕실(王室) 각 가계(家系)의 씨족집단회의(氏族集團會議) 등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또한 그 구성원을 대등ㆍ군신ㆍ귀족ㆍ재상(宰相) 등으로 파악하고, 회의 주재자로서 상대등을 관련시킴으로써 이에 대한 논쟁은 전제왕권의 존부(存否)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고기 화백의 구성원으로 일컬어지는 대등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논고와 중고기 화백의 성격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부체제론과 관련시켜 제간회의(諸干會議)-귀족(대등)회의-군신회의-대신회의(大臣會議)라는 발전과정을 제시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화백회의의 성격을 군신회의로 보는 견해는 화백회의가 남당으로부터 유래 변천한 것으로서, 군장(君長)의 선정이나 전쟁 등 대사건이 있어야 개최되며, 회의 구성원은 17관등을 지닌 군관(群官)으로 후세의 백관회의(百官會議)ㆍ군신회의와 같은 것이라는 관점이다. 남당은 원시부족장회의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신라 초기에는 국가생활의 중심적인 정청(政廳)으로서 회의기관이자 실무집행기관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지증왕대(智證王代)에 이르러 품주가 설치되면서 남당과 실무집행부가 분리됨으로써 남당은 단지 군신합동체의 회의ㆍ회견(會見)ㆍ기타 종종의 의식을 집행하는 기관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 통일 이후는 순전한 의식적이며 형식적인 존재로 남게 되면서 회의기능은 여기서 분리 독립되어 평의전(平議殿)이란 별개 명칭의 신설 전당으로 이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족장회가 귀족회의로 발전했다고 본 견해는 상대등과 대등의 문제를 밝히는 과정에서 귀족회의의 구성원이었던 대등은 지난날의 족장층이 사회적으로는 골품제나 부제로 편성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대등이란 관직이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중앙관직으로서의 대등 및 대등으로써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시초를 대략 내물마립간 때로 상정하였다. 처음에는 17관등에 임명된 전 관료가 화백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진골(眞骨)을 중심으로 한 회의체로서의 화백회의로 변모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처음 신라 귀족회의의 의장은 왕 자신이었으나, 전제화되어 가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귀족의 통솔을 위하여 상대등을 설치하면서 상대등으로 귀족회의 주재자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견해의 특징은 우선 중고기 귀족회의체로서 대등회의(大等會議)란 개념을 새로이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왕-대등’회의에서 ‘상대등-대등’회의로 전환하면서 국왕 중심의 의결기관에서 귀족들 의견의 대변기관으로 기능이 변화하였으며, 중대에 이르러 실무행정부서인 집사부의 강화와 전제왕권의 성립으로 화백의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본 데 있다. 이 견해는 신라 정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상대등이나 화백회의에 대한 정설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마립간시대 씨족회의 전통을 이은 것이 화백회의이며, 이 화백회의 구성원을 내물왕계 후손이라는 공통의 혈연의식으로 맺어진 내물왕계 씨족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신라사회를 기본적으로 골품제 원리에 의해 점철된 사회로 보는 관점에 바탕한 것으로서 화백회의 구성원을 나물왕계 씨족집단으로 풀이하고, 중대에도 화백회의가 무력화된 것이 아니라 국왕 또한 나물왕계 씨족의 일원으로서 화백회의를 적절히 이용했다는 입장이다.

또한 위의 견해들을 절충하여 중앙행정과 관련된 모든 신료들이 참석하는 남당회의와, 남당회의 참석자 가운데 상급신료인 대등들이 참석하여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화백회의가 병존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박ㆍ석ㆍ김 3씨족을 비롯한 지배층 중심의 궁실(宮室) 정치체제에서 군신집단에 의한 정사당 중심의 정치체제를 거쳐 남당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다가 마립간시대에 이르러 대등으로 이루어진 귀족회의로 발전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화백회의가 열린 장소로서 남당과 정사당, 그리고 4영지(靈地)(청송산(靑松山), 피전(皮田), 우지산(亏知山), 금강산(金剛山) 등이 주목된다.

변천

신라는 6세기에 들어와 종전의 연맹왕국체제를 청산하고 왕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516년(법흥왕 3)에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兵部)의 설치라든지, 520년(법흥왕 7)에 중국의 법전체계인 율령(律令)을 반포한 것은 이 시기의 집권화ㆍ법제화 경향을 나타내 주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여러 중앙 관청이 설치되어 업무별로 전문화되는 한편 관료들도 서열에 따라 조직화되어 갔다. 다만 신라에서 율령을 수용할 당시의 군주권은 아직 미약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왕경 6부를 구성하는 족장세력과의 협의를 거쳐 주요 정무를 수행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형식은 비록 군주제였으나, 실제 귀족제적 구성을 면할 수 없었다. 법흥왕 때 불교 공인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공인하려는 왕과 반대하는 신하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을 때, 왕의 측근인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과 신하들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어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정치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 화백회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가 앞에서 언급한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울진봉평신라비」이다. 503년에 건립된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 『삼국사기』에 500∼5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지증왕과 같은 사람임)이 수도인 경주 6부의 대표자들과 함께 분쟁 중인 어떤 사람의 재산 소유에 대한 사항을 함께 의논, 확인해준 사실이 보인다.

한편 율령을 수용한 뒤인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에는 국왕이 사부지(徙夫智) 갈문왕 등 13명의 신하들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조정에 항거한 거벌모라(居伐牟羅)지역 주민에 대한 처벌조치를 의논, 결정하게 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 보이는 의결기관은 화백인 듯하다. 그런데, 그 뒤 531년(법흥왕 18)에 최고 관직인 상대등을 설치하였다. 이 상대등은 어떤 관청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귀족회의의 의장이었으며, 이 회의가 다름아닌 화백회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등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화백회의의 의장이 국왕 또는 갈문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6세기 초에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상대등이 설치되어 여러 귀족들을 통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등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경 화백회의는 대등들로서 구성되었다. 1978년 충청북도 단양지방에서 발견된 이른바 「적성비(赤城碑)」(540년대 말에 세워짐)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이름이 보이며, 560년대에 건립된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에는 ‘대등’이란 용어가 보인다.

골품에 따르는 복식에 대한 규정을 기록한 『삼국사기』 권33 색복지(色服志)에도 ‘진골대등’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진골과 그리고 대등의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진골로서 대등의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대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진골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자기들의 대표로 상대등을 뽑았다. 상대등은 왕위의 교체와 때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과 권위(權威)를 서로 보완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 상대등은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첫번째가는 후보자로 여겨졌다. 654년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죽자 당시 상대등 직에 있던 알천(閼川)이 귀족들로부터 섭정(攝政)의 지위에 추대를 받은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대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문제를 비롯해 외국과의 전쟁, 법률제정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심의 결정하였다. 요컨대 화백회의는 대체로 삼국통일 무렵까지 행해진 진골귀족들에 의한 연합정치를 잘 상징하고 있다. 실제로 이 회의에서 귀족들은 579년 진지왕(眞智王)이 품행이 나쁘다는 구실로 왕위에서 몰아냈으며, 647년에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국가 비상시에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폐위(廢位)를 결정하는 등 크게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647∼654) 때 상대등 알천을 비롯해 임종(林宗)ㆍ술종(述宗)ㆍ호림(虎林)ㆍ염장(廉長)ㆍ김유신(金庾信) 등 6명의 대신(大臣)이 경주 남쪽의 오지산 바위에서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의논한 사실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신들은 오지산 이외에도 경주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신령한 곳을 택해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647년 선덕여왕을 몰아내려고 한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부터 화백회의는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다.

이에 뒤이어 681년(신문왕 1)에 바로 며칠전까지도 상대등이었던 김군관(金軍官)이 김흠돌(金欽突) 일파의 모반사건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처형된 것은 새로운 시대의 귀족세력 및 그 대표자인 상대등의 운명을 결정지어준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삼국통일 후 왕권이 차음 전제화되고, 관료제도가 발전되면서 화백회의는 그 정치적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화백회의는 국왕 직속의 최고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에 정치적 실권을 넘겨주고, 다만 집사부의 행정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자의 역할에 그치고 말았다.

756년(경덕왕 15) 2월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 것을 계기로 시정의 득실(得失)을 강경한 어조로 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정월에 병을 이유로 상대등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몰락한 780년 이후 화백회의, 특히 그 의장인 상대등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어 정치의 일선에 다시금 등장하였다.

실제 9세기경의 상대등은 왕의 가까운 친척들이 되는 예가 많았고, 이런 경우에 대개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귀족회의의 주재자라는 그 고유의 임무만은 변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이처럼 화백회의는 신라의 연맹왕국 형성과정에서 발생해, 특히 진골귀족 연합시대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전제왕권시대에 크게 위축되었다가 왕권이 약화된 780년을 계기로 다시금 그 중요성이 커지는 등 왕권을 중핵으로 한 정치적 세력의 변동에 따라 그 위상이 자주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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