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의 중앙저지를 통해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본류의 길이는 525.15㎞로, 남한에서는 제일 긴 강이며 북한을 포함하면 압록강 다음으로 길다. 총유역면적은 2만 3860㎢로 남한 면적의 4분의 1, 영남 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낙동이란 명칭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가야와 신라 천년 동안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강이다. 오늘날은 특히 우리나라 근대화와 산업화의 동맥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개 관
본류의 길이 525.15㎞. 남한에서는 제일 긴 강이며, 북한을 포함하면 압록강 다음으로 길다. 총유역면적은 2만 3860㎢로 남한면적의 4분의 1, 영남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함백산에서 발원한 본류는 남류하다가 안동 부근에 이르러 반변천(半邊川, 116.1㎞)을 비롯한 여러 지류와 합류, 서쪽으로 흐르다가 함창과 점촌 부근에서 내성천(乃城川, 107.1㎞)과 영강(穎江, 69.3㎞)을 합류한 뒤 다시 남류한다.
이 유로(流路)에서 상주와 선산에 이르러 위천(渭川, 117.5㎞)과 감천(甘川, 76.6㎞)을 합하고 다시 대구광역시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118.4㎞)과 합류한다. 경상남도에 접어들면서 황강(黃江, 116.9㎞)과 남강(南江, 193.7㎞)을 합한 뒤 동류하다가,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 101.0㎞)을 합친 뒤 남쪽으로 유로를 전환하여 부산광역시 서쪽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수(洛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되어 있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영남지방의 거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년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왔다.
오늘날은 특히 우리 나라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동맥으로서 낙동강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유역의 자연
본류의 주방향은 남북이나 두 구간에서는 지질구조의 지배를 받아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 즉, 안동 부근에서 점촌까지는 안동 단층곡(斷層谷)의 지배를 받아 서쪽으로 흐르고, 점촌 부근에서는 변성암지대와 중생대 퇴적암의 지질경계를 따라 남류하며, 남강의 하류지점에서부터는 동서구조선(東西構造線)의 지배를 받아 다시 동쪽으로 흐른다.
부산 서쪽에 이르러 언양 단층선의 남쪽 연장선을 따라 남류하여 바다로 흘러든다. 낙동강은 경사도가 극히 완만하여, 하구에서 약 344㎞ 상류에 있는 안동 부근도 하상고도(河床高度)가 90m에 불과하다.
하상의 평균경사는 1만분의 17로서 압록강보다 완만하다. 전 유로 가운데 가장 경사가 급한 곳은 태백산지중의 유로로 경사도가 1만분의 46에 이르며, 네 곳에 경사의 천이점(遷移點:경사가 급변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태백산지를 지나 경상누층군(慶尙累層群)의 퇴적암지대로 들어서면 하상의 경사는 1만분의 3 정도로 완만해진다. 이에 따라 중류나 하류는 평형상태에 달하고 흐름이 완만해지며 사행유로(蛇行流路)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마지막 160㎞ 구간에서의 경사는 1만분의 1 정도로 극히 완만하다. 이렇게 유로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안동까지 배가 올라갈 수 있어서,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내륙수로교통의 동맥이 되었다.
하안에 발달한 하단(下湍)·구포·삼랑진·수산(守山)·남지(南旨)·율지(栗旨)·현풍·왜관·낙동·풍산·안동 등은 과거의 나루터취락이거나 선착장들이었다.
낙동강은 구릉성의 저산성산지(低山性山地)를 흐르기 때문에 상류에서 왜관까지는 분지성평야나 소규모의 곡저평야(谷底平野)를 이룰 뿐이지만 하류 쪽으로는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등 범람원의 경관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고령 부근부터 삼랑진까지에는 자연제방 후방에 배후습지성 소택지(沼澤地)가 무수히 분포하는데, 용호(龍湖)·우포(牛浦)·사몰포(蛇沒浦)·춘산호(春山湖)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개 소지류가 본류에 합류하기 수킬로미터 전에 나타난다. 이것은 후빙기(後氷期) 해면상승으로 지류들이 침수된 뒤 본류의 자연제방이 막았기 때문이다. 하류인 삼랑진에서 물금(勿禁) 사이의 약 19㎞ 구간은 홍수 때 강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협곡(峽谷)을 이루고 있어 남강댐과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범람이 심하였다.
낙동강의 하구에는 삼각주(三角洲)가 발달하여 우리 나라 최대의 충적평야인 김해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양산협곡을 벗어난 본류는 구포의 상류쪽 2㎞ 지점에서 2대 분류로 갈라지며, 이들 분류는 다시 2차적인 분류로 갈라진다. 갈라진 분류는 하류에서 다시 만나면서 대저도(大渚島)·맥도(麥島)·일웅도(日雄島) 등의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한다.
이 삼각주는 전체적으로 동서 16㎞, 남북 18㎞의 대충적지를 이룬다. 20세기 이후에는 홍수방지와 삼각주개발을 위하여 인공제방을 많이 축조하였으므로, 수향(水鄕)과 같은 경관이 나타난다. 최근에는 염해(鹽害)의 방지와 용수공급을 목적으로 하구에 거대한 하구언(河口堰)을 건설하였다(1987년 11월 완공).
낙동강 유역은 서쪽과 북쪽은 소백산맥, 동쪽은 태백산맥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남해에 열려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분지상(盆地狀)을 이루며, 여기에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종관한다.
유역 내에는 기류의 유입 방향, 지형, 해안과의 거리 등에 따라 기후의 지역차가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는 내륙적 분지성 기후의 특성이 현저하다.
연평균기온은 12∼14℃이며, 최한월(最寒月)인 1월 평균기온은 -3.0∼2.2℃, 최난월(最暖月)인 8월은 25∼26℃가 되어, 겨울이 여름보다 지역차가 크다. 특히 전형적인 내륙분지인 대구는 우리 나라의 극서지(極暑地)로서 일최고기온이 40℃를 넘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하구 주변의 남해안지역은 겨울이 비교적 온화한 해양성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강수량의 분포는 지형과 기류의 방향, 또 온대성 저기압이나 태풍 등의 통과 위치에 따라 지역적인 차가 크다. 연강수량의 분포를 보면, 대구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역은 소백산맥·태백산맥의 우음작용(雨蔭作用)으로 인하여 900㎜ 이하의 과우지역을 이루는 데 반하여, 하류 유역으로 갈수록 여름 남서기류의 바람받이지역에 해당하고, 또 남해해상을 빈번히 통과하는 온대성 저기압이나 태풍으로 인하여 1,400㎜ 이상의 다우지를 이룬다.
계절적으로는 동계에 강설량이 적어 우리 나라의 과설지역(寡雪地域)이 되고, 하계에는 전선이나 태풍의 통과로 인한 집중호우가 빈번하여 매년 범람과 침수의 피해가 크다. 일조율과 증발량의 분포를 보면,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내륙분지지역이 높고 하류지역이나 주변 고산지역이 비교적 낮다. 최근 안동댐의 건설로 안동지역에 안개일수가 증가하고 있다.
낙동강 유역의 주요 식물상을 보면 중류·상류 유역은 남부난온대낙엽·활엽수림대, 하류유역은 조엽수림대(照葉樹林帶)에 속한다. 전자는 주로 온대성 식물과 만주계식물(滿洲系植物) 및 한국고유식물이 혼재하며, 극히 일부 난대성 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온대성 수종으로는 잣나무·육송·구상나무·노간주나무 등의 침엽수와 굴피나무·박달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느티나무 등의 활엽수가 있고, 만주계식물은 전나무·분비나무·사시나무·가래나무(산추자)·피나무·물푸레나무 등이 있다. 한국고유식물로는 떡졸참나무·참조팝나무·떡갈매나무·철쭉나무·개나리 등이 있다. 최근 낙동강 하류의 식물조사에 의하면 총 151과 910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낙동강 하류의 명지(鳴旨) 지역에서만 74과 366종의 식물이 조사되었는데,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해안식물로는 갯줄고사리·갯메꽃·보리사초·좀보리사초·왕보리사초·달뿌리풀·모새달·갈대·갯잔디·갯갓사초·갯논쟁이·나문재·수송나물·갯솔나물·갯질경이·갯씀바귀 등이 있다.
이 지역에 많은 식물이 분포하는 원인은 내륙성 식물이 이 강물에 의하여 운반되고, 또 대한해협의 조류(潮流)나 철새에 의하여 일본·시베리아 등 해외의 식물이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물상(動物相)으로 유명한 것은 하구 일대의 철새떼이다. 낙동강하구의 을숙도(乙淑島)에서 사자도·십리 등과의 사이에 펼쳐진 갈대밭과 모래톱은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구 일대는 다른 하천과 달리 넓은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수심이 얕고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각종 동·식물성 플랑크톤, 연체동물, 갑각류, 소형 어류, 그 밖에 여러 해조류가 번식하고 있어 조류의 먹이가 풍부한 곳이다.
또 겨울이 비교적 온화하고 여름은 시원한 해양성기후에 속하므로 겨울철새의 월동지, 여름철새의 번식지로 매우 적합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조류는 약 120종으로, 이 가운데 사철을 두고 머무는 텃새[留鳥]가 10여 종이고 나머지 110여 종은 철새[候鳥]들이다.
텃새로는 참새·꿩·때까치·매비둘기·딱새·노란턱뫼새·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이 손꼽힌다. 이들 텃새 중 겨울에는 주변의 갈대밭에서 머물다가 여름에는 산에서 서식하는 종류도 있다.
겨울철에 오는 새는 10월 상순부터 3월 중순까지 머무는데 백조와 오리종류로, 청둥오리·흑부리오리·쇠오리·고방오리·흰쭉지·쇠기러기·큰기러기·두루미·저어새·느시·아비·농병아리 등이 있다.
여름철새는 대체로 4월부터 9월 사이에 볼 수 있는 새들로, 백로·황새·왜가리·듬불해오라기·게게비·흰물떼새·뜸부기·쇠제비갈매기·물총새 등이다. 이 밖에 우리 나라를 통과하면서 봄·가을 동안 잠깐씩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새로서 마도요·뒷부리도요·노랑발도요·좀도요 등의 도요새무리와 왕눈물떼새·검은머리물떼새·게꿩 등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완전 멸종되어 현재 3점의 표본으로 남아 있는 원앙이사촌 두 마리가 우리 나라에서 포획된 것인데, 그 가운데 한 마리는 1913년 12월 낙동강하구에서 잡힌 것이다. 그러나 1970년을 전후하여 이들 철새류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중류와 상류나 부산 주변의 공업단지에서 배출되는 여러 가지 오염물질과 농업 및 생활폐수의 유입, 인위적인 남획 등으로 철새수가 급격히 감소하는데다, 을숙도를 지나는 하구언의 건설로 철새가 정박할 터전이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유적
낙동강 유역에는 역사시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동(中東) 일대는 특히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구미산업단지가 건너다보이는 낙동강 동편의 중동 일대에서 구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돌망치 등 석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석기는 구석기시대 중기의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의 선사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를 거쳐 두만강으로부터 들어왔다면 영남지방의 신석기문화는 낙동강 유역에서 비롯되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로 대표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서남도서(西南島嶼)·두만강 등의 여섯 군으로 나누어진다.
낙동강 유역에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서생(西生)과 부산 영도의 동삼동과 조도(朝島:아치섬)·다대포(多大浦) 등지의 패총이 신석기시대 유물의 출토지이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 유역의 영남지방은 특히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이 시대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대구·영천·경주 일대로, 이곳은 대동강 유역을 제외하면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철기문화와 병행하여 삼한이 형성되는데, 대체로 마한이 경기·충청·전라도지방을, 진한이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지방을, 그리고 변한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지방을 각각 차지하였다.
따라서 삼한 중 진한과 변한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역사의 터전을 잡은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변한조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 진한과 변한에는 모두 24개의 국가가 있었다.
사실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의 변한과 진한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철기시대를 맞게 된다. 울산·동래지방의 제철유지(製鐵遺址) 등이 철기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또 김해 등지의 김해식토기와 사천·진주·고성·밀양·동래 등지의 패총·지석묘·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철검 기타 철제유물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김해패총 등에서는 탄화된 쌀알이 나와 이미 저습한 충적평야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특히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어 해륙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비옥한 충적평야와 이어져 있어 농경생활이 발달하였다.
이 같은 여건에 힘입어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가야와 신라문화가 발달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은 고분유적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보아 각 군마다 몇 군데씩 군집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특히 경주·대구·고령·의성·상주 등지에 무수한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고분 중에서도 적석목곽분은 경주시내에 집중되어 있고, 간혹 유사한 것으로서 대구 구암동과 의성의 탑리에 유존한다. 특히 3면의 벽과 천장을 먼저 쌓고 관을 측면 입구로 넣은 뒤, 입구에서부터 돌을 쌓아 벽으로 만든 횡혈식(橫穴式)이 낙동강변에 간간이 분포하고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은 그 구조가 석실로 되어 있어 일찍부터 도굴당하기 쉬웠으나,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지방의 경우는 묘제가 도굴하기 어려운 적석목곽분이고, 또 냇돌벽으로 된 석곽이어서 많은 유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4세기까지 낙동강을 경계로 한 사로국은 강 서쪽의 대가야 등 비교적 큰 국가와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인 560년대를 전후하여 낙동강 유역은 신라의 핵심 부분이 되어 이를 바탕으로 1세기 뒤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삼국통일로 커다란 영토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새로운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 5소경제도를 채택하였다.
9주 가운데 옛 신라 및 가야의 땅인 낙동강유역을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삽량주(歃良州:지금의 양산)·강주(康州:지금의 진주)의 3주로 나누었다. 낙동강 유역의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가 신라인 데 반하여, 이보다 앞서 순전히 낙동강 하류에서 이 강을 중심으로 산재하여 있던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이룩한 나라가 가야국이다.
가야는 42(?)∼562년 사이에 융성하였던 나라로 금관가야(지금의 김해)·아라가야(지금의 함안)·고령가야(지금의 진주)·대가야(지금의 고령)·성산가야(지금의 성주)·소가야(지금의 고성) 등 6개 국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이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된 유적인 구지봉(龜旨峰)과 수로왕릉이 김해시에 있고, 수로왕비인 허왕후(許王后)가 아유타국에서 돌배를 타고 육지에 처음 상륙하였다는 곳이 낙동강 하구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다.
낙동강 연안의 주요 사적지를 상류로부터 헤아려 본다면, 제일 먼저 부석사(浮石寺)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손꼽힌다.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1963년 지정된 사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세워진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주자학의 전래자인 안향(安珦)의 학풍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부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550년(명종 5)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온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으로 사액하였다.
이 서원에는 안향 초상(국보, 1962년 지정)·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1968년 지정)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부석사는 영주시의 소수서원보다 북쪽에 있는 사찰로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화엄종(華嚴宗)을 열었다. 이곳의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은 고려 때 건조된 건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또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조사당(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조사당벽화(국보, 1962년 지정) 등 모두 5개의 국보가 보존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서 안동쪽으로 가까이 가면 조선 유학의 거봉 이황이 그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낙동강변에 세운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는 하회탈(국보, 1964년 지정)이 전해 오고 있는데, 이 곳 동민들이 음력 정월 2∼15일 사이 동제(洞祭)를 지낼 때 사용하던 탈이다.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는 직지사(直指寺)가 있고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는 고려 때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쓴 인각사(麟角寺)가 있다.
인각사에는 일연이 열반한 지 3년 뒤인 1295년(충렬왕 21) 그의 문인 법진(法珍)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높이 190㎝, 너비 1m의 크기였는데 파손되어 높이 120㎝로 줄어들었다. 충렬왕은 일연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정조탑(靜照塔)이라 하였다.
낙동강이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는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도리사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온 아도(阿道)가 맨 먼저 자리잡고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선산 금오산 기슭에는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끝내 뿌리치고 은거하며 살았던 길재(吉再)를 기리어 지은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경상남도로 접어들면서 황강 상류에 합천 해인사가 있고, 그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의 삼각주가 밤마리라고도 불리는 율지리(栗旨里)이다.
이 곳에서 오광대(五廣大)가 시작되어 「진주오광대」·「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로 전파되었고, 낙동강의 동편인 부산으로 전래되어서는 「동래야류 東萊野遊」와 「수영야류 水營野遊」로 연희되었다.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는 신라진흥왕이 중신들을 거느리고 국내를 순수하며 민심을 보살피고, 그곳에 국방요새를 설치하면서 세운 기념비에 해당하는 순수비가 있다. 국내에 있는 4개의 순수비 가운데 창녕의 순수비는 너비와 높이가 비슷한 167㎝, 두께 30㎝ 크기에 모두 27행이며, 각 행마다 18∼27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561년(진흥왕 22) 2월 1일에 세웠다는 연대가 적혀 있어 사료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으로 지적된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변에는 진주성과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진주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왜구를 방비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金時敏)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軍官民) 6만여 명이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 무렵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당시 도요토미(豐臣秀吉)의 15만 대군이 부산항으로 몰려왔을 때 죽음으로 저항하던 곳이 동래·부산지방의 전투였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적에 대항한 주민들 중에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부녀자와 관기(官妓)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 동래성 항전을 기리기 위하여,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직한 지 13년 뒤인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윤훤(尹暄)이 송공사(宋公祠)를 건립하였다.
그 뒤 인조가 충렬사(忠烈祠)로 사액하였다. 이 밖에도 밀양시의 영남루(嶺南樓)와 조선유학자 김종직(金宗直)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그리고 수영성(水營城) 등 많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시의 세계에서 낙동강은 민족이 발을 붙이고 사는 생활의 터전, 젖과 꿀이 흐르는 민족의 샘 혹은 어머니와 사랑 등으로 추구되고 있다. 김용호(金容浩)는 1938년 『사해공론 四海公論』에 197행으로 된 장시(長詩) 「낙동강」을 발표하여, 일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의 참상과 애환을 노래하였다.
“……북쪽은 구름이 깃들인 고향/우리들은 구름의 의도를 따라/북쪽으로 간다.”바로 생명이나 다름없는 토지를 빼앗기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처절한 모습을 낙동강을 통하여 절규한다.
“……내 사랑의 강!/낙동강아!/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중략) ……/초조와 불안과 공포가/나흘낮 사흘밤/우리들의 앞가슴을 차고 뜯고/울대처럼 선 왼 산맥의 침묵이 깨어질 때/뻣뻣한 대지를/고슴도치처럼 한 손에 휘어잡고 메어친/꽝하는 너의 최후의 선인은/우리들의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 (중략) …… 아! 그리운 내 사랑의 강!/낙동강아!/너는 왜 말이 없느냐/너의 슬픔은 무어며/너의 기쁨은 무어냐…….”
유치환(柳致環)은 1950년대 중반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를 발표하여 낙동강에 대한 사랑을 읊었다.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흘러흘러 삼랑(三浪)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기름진 옛 가락(駕洛) 백리벌에/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중략) ……/낙동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순탄하고 가난한 겨레와 더불어/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중략)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낙동(洛東)의 가람이요,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이달희(李達熙)는 「낙동강」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를 이어 열한편의 연작시를 수록한 시집 『물의 상징법』을 1971년에 펴내었다. 그의 시 「낙동강 4」에는 낙동강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우리 겨레의 한(恨)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싸르륵 싸르륵/마른 갈밭을 헤치는 회오리바람을 지나/모랫바람이 불꽃처럼 확확 타오르는 강변을 지나/대한(大寒)날/얼어붙은 낙동강을/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호호 언 손 불어주시던/사천년의/그 면연(綿延)한 사랑…….”
그리고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최화국(崔華國)은 일본에서 「낙동강」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낙동강은 향수의 거울이 되고 있다. “…… 가을의 호수처럼 깊게 맑은 눈동자의 당신/당신 때문에/가여은 조국마저 빛나 보였다. …….”이 밖에 전상렬(全尙烈)이 1971년 『낙동강』이라는 시집을 발표하였다.
소설 속에서 낙동강은 그 강을 이웃하여 살아왔고, 또 착하게만 살고 있는 강변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의 무대로 자주 다루어져 왔다. 김정한(金廷漢)은 강변에 깔린 민중의 소리를 소설로써 형상화하였다. 「모래톱이야기」·「뒷기미나루」·「두메」·「산서동 뒷이야기」·「수라도 修羅道」 등이 모두 그러한 작품이다.
「모래톱이야기」는 낙동강 하류의 어느 외진 모래톱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로, 소수 유력자와 선량한 다수 민중 사이의 동태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수라도」는 여주인공 가야부인의 친정이 바로 이 강가이고, 시가 역시 강건너마을에 있다. 이 강가에서 벌어진 허씨 일가의 4대에 걸친 민족의 수난사가 그 줄거리이다.
「뒷기미나루」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낙동강 상류 뒷기미나루의 뱃사공이 된 여인의 궁핍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착한 민중의 수난상을 낙동강변의 무대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즉, 작가는 낙동강변의 문학을 통하여 역사 속에 흐르는 민중의 피맺힌 소리를 집단사회의 실태로서뿐 아니라 인간구원의 보편타당한 문제로 들고 나옴으로써 민중문학의 기반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낙동강이 소재가 된 옛 시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부사 漁父詞」가 손꼽힌다. 조선조의 어지러운 당쟁을 피하여 조용히 자연으로 찾아드는 선비들에게 낙동강은 안식처와 귀의처가 되었다.
백구와 물고기, 그리고 너울너울 흘러가는 뜬구름 속에서 세상의 소용돌이를 잊고 한가로이 강호가(江湖歌)를 읊조리며 소요하는 선비들의 심경이 낙동강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이중에 시름 없으니/어부의 생애로다/일엽편주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두고/인세를 다 잊었거니/날 가는줄 알랴.”
낙동강이 크게 아홉 굽이를 돌아흐르는 구곡장류(九曲腸流) 중 세번째가 월천(月川)이고 네번째가 분천(汾川)이다. 도산서원 앞을 지나는 강을 분천이라 하는데, 이 일대에서 조선시대 강변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사」가 집대성되었다.
이현보(李賢輔)는 조선 명종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분천 근처로 내려간 뒤 자연을 노래하며 저 유명한 「어부사」를 재구성하였다.
「어부사」는 고려 충목왕 이전부터 불린 노래였으나, 이현보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여 ‘닫드러라 닫드러라’, ‘이어라 이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서와’ 같은 「배따라기」의 후렴을 1장씩 섞어 엮었다.
“낚싯대 한 끝에 만사를 잊으니/정승벼슬을 준대도/이 강산과 바꾸잖으리.”이현보의 「어부사」를 효종 때 윤선도(尹善道)가 다시 우리말로 다듬어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다.
분천에는 이현보가 가사를 읊조리던 ‘농암’이라는 바위와 그를 기리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었으나 안동댐공사로 수몰되었다. 또한 이규보(李奎報)도 한시 「낙동강」을 노래하였다. 이 밖에 낙동강유역권은 아득히 가야·신라 문화의 발상지인 만큼 가야국의 개국을 예고하는 노래라 할 수 있는 「구지가」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에서 「구지가」가 불렸고, 거기서 나온 금합(金盒)에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지가」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또 신라의 「처용가」를 낳게 한 처용암도 낙동강문화권의 울산 앞 개운포(開雲浦)에 있다.
미술작품에서의 낙동강은 극히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노송(老松)이 우거진 절경이나 배 위에서 유유히 낚시나 즐기는 그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낙동강에 대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로서의 본격적인 그림이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박정규(朴正圭)는 1984년 낙동강 1,300리를 세로 80m, 가로 1.1m의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발원지인 강원도 황지로부터 부산의 다대포 앞 하구에 이르는 낙동강 전역을 한장의 화선지에 그려 「낙동대장강 洛東大長江」이라 하였다. 이 그림은 크기에 있어서 우리 나라 최대로 기록된다.
그림은 굽이굽이 산과 들을 감돌아 흘러내리는 낙동강 전역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를 통하여 기록성과 사실성·회화성에 최대의 역점이 주어졌다.
나룻배가 있고 철교가 있고 전통촌락이 있는가 하면, 공장의 굴뚝이 숲을 이룬 공업단지와 고속도로가 있다. 특히 강의 하류인 을숙도 부근에는 하구언이 건설되기 이전의 풍경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변하기 전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그림 가운데에는 이의주(李義柱)의 그림도 손꼽힐 만하다.
1982년도 기록화로 그린 이 그림은 강 하류인 하단(下湍) 앞의 하구를 그린 것으로 크기가 500호에 이른다. 갈대밭과 농가의 채소밭, 모래톱, 물살이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 그림 역시 하구언을 건설하기 이전의 하구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자원과 이용
낙동강의 연평균 유출량은 약 110억㎥로 추산되나, 해에 따른 변동이 커서 다우년(多雨年)에는 200억㎥를 상회하지만, 과우년(寡雨年)에는 40억∼50억㎥로 떨어진다.
이 연간 유출량도 3분의 2에 해당하는 물이 6∼9월 사이의 4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나머지 3분의 1 정도의 수량이 8개월 동안에 흐른다. 그러므로 3분의 2에 해당하는 절대량의 물이 홍수가 되어 일시에 흘러가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낙동강 유역의 강우특성 때문인데, 연강우량의 66%가 6∼9월의 우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건조기인 10월부터 3월까지의 6개월 동안은 연강우량의 18%가 내리고 이앙기인 4월과 5월에는 연강우량의 16%가 내린다. 또한 낙동강은 홍수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데다가 물의 유황(流況)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가 어려운 하상(河床)으로 되어 있다.
하상과 강우형태, 그리고 주변 산지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총유사량은 연간 약 1천만 톤으로 추정되고 있다. 1㎢의 하상에는 연간 400t에 해당되는 토사가 유출된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유사량은 풍화 및 분쇄된 기저암층의 심도가 커서 침식작용이 쉽게 일어나는 본류의 서쪽지역에서 유출된 것이다.
이 같은 낙동강의 수자원, 이를테면 홍수와 갈수의 자원화를 위하여 국제연합개발기구(UNDP) 낙동강유역조사단이 5년간의 조사를 마치고 1973년도에 출간된 『낙동강유역개발지원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유역 내에 30개 댐지점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18개 댐과 1개의 하구언후보지를 지정하였다.
18개 댐의 후보지 중 안동·합천·임하의 3개 댐은 본류연안개발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15개 댐은 지류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지류연안개발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같이 본류든 지류든 간에 댐건설의 적지가 상류에 위치하여야 하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18개 댐이 전부 개발된다 하더라도 집수면적상(集水面積上)으로는 전 낙동강 유역의 31.5%, 유량조절면으로는 연간 유출량의 22.4%의 조절능력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들 18개 댐 가운데 안동댐은 저수지의 규모와 조절면적 및 유량조절능력이 가장 큰 댐으로서 18개 댐군(群)의 31%, 21%, 23%를 각각 차지한다. 그리고 안동·합천·임하댐 등 3개 댐이 18개 댐의 조절량의 50%를 상회한다.
실제로 1969년에 건설된 남강댐과 1976년에 건설된 안동댐은 홍수와 갈수의 조절 및 전력을 생산하여(남강댐:1만2600㎾, 안동댐:9만㎾) 유역의 농업과 공업의 발전은 물론 생활용수의 이용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포장수력면(包藏水力面)에서 보면 낙동강·한강·금강·섬진강의 총포장수력은 약 300만㎾이며, 낙동강은 그 가운데 약 13%인 38만㎾의 포장수력을 가지고 있다.
낙동강의 또 하나의 특성은 하류지방에서 염분 피해가 많이 나타남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벼생산량에 대한 염분 피해가 컸던 1965년에는 1ha당 2.5톤의 수확량을 거둔 데 비하여, 피해가 거의 없었던 1971년도에는 5.4톤으로 두 배 이상의 증산을 볼 수 있었다.
염분피해는 벼농사에 대한 피해도 심각하지만 부산시의 상수도원으로서의 피해도 크다. 이와 같은 피해를 종합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 하구에 하구언을 건설하여, 1987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이 밖에도 수자원으로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이 있다. 『국내 내수면자원의 잠재력조사서』(1970)에 따르면 낙동강의 담수어 총생산능력은 1만1900t이며, 1970년도의 어획고는 370t 정도로 전국 내수면어획고의 약 30%에 이른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의 전환을 전국에서 맨 처음 시작한 곳으로, 1919년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에 잉어양식장이 설치되었다.
이 밀양양식장은 1922년도의 대홍수로 유실되고, 6년 뒤인 1928년도에 진해에 다시 대규모 양식장이 세워졌다. 1968년도부터 밀양에 다시 양어장이 설치되어 연어의 회귀성 등 생태를 추적하고 있다.
낙동강유역권은 관광자원의 면에서 볼 때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동댐과 대구·경주·부산의 해변까지 실로 관광자원으로서의 입지적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영주 부석사와 희방사(喜方寺), 그리고 순흥의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상류지역의 관광권이 높이 평가된다.
이 유역권에는 풍기의 특산물인 인삼도 관광자원으로 큰 몫을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안동댐과 도산서원 그리고 댐 주변의 민속촌이 큰 관광자원으로 등장하였고, 안동권으로서 하회민속마을이 각광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가(古家), 하회별신굿, 하회탈, 쥐불놀이 같은 민속자료를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면 보다 괄목할 만한 자원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다.
구미의 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과 김천의 직지사, 상주의 문장대(文藏臺)도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경상남도로 접어들면 합천댐을 중심으로 하는 호반관광지가 조성되었다. 합천댐은 창녕 부곡온천(釜谷溫泉)과 합천 해인사, 멀리 경주 일원을 1일관광권으로 등장시켰다.
경부고속도로와 구마고속도로 및 88올림픽고속도로가 서로 연결되고, 그 밖의 각 국도가 확장되고 정비됨으로써 안동댐·대구·해인사·부곡온천·부산을 연결하는 낙동강유역권의 관광자원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지리산과 남해안의 한려수도, 그리고 경주 일원까지 연결시켜 광역의 관광권이 형성되었다.
특히, 1987년에 완공된 낙동강 하류의 하구언과 주변의 긴 갈대밭, 그리고 철새도래지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산업관광자원면에 있어서도 낙동강유역은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구미산업단지와 포항제철, 그리고 울산·온산공업단지, 창원의 기계공업단지 등이 모두 낙동강의 수자원을 이용하여 산업기지화하였다.
이와 같이 낙동강유역은 천연적인 자연경관과 문화·역사적인 풍부한 유산 및 현대화된 산업시설이 어울려 우리 나라 제1의 관광권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유역권인 경상남북도에서는 전국 광물채굴량의 약 19%를 생산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발행한 『낙동강유역개발지원조사보고』에 따르면 석탄과 흑연은 낙동강 북단과 북서쪽에 있는 쥐라기와 오르도비스기의 암층에서 주로 생산되며, 이 지역의 석탄 총생산량은 전국의 3분의 1로 추산된다.
석회석 및 시멘트 생산지역도 유역 북부의 쥐라기 암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색 고령토는 유역내에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중요한 금속광물은 텅스텐·납·주석 등이며, 구리·아연·망간·몰리브덴·철·은 등도 다소 생산된다. 비금속광물로는 운모·규사 및 장석 등이 소규모로 산출되고 있다.
하구의 녹산공단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해안의 다도해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광활한 갈대밭과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어 철새 도래지로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부산시는 하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거덕도를 부산신항항만지역으로 정하고 거대한 항만시설을 계획하여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부산신항은 환태평양시대의 국제물류항으로 개발, 싱가폴과 일본의 고베항을 비롯한 세계의 유수한 항구와 경쟁력을 갖는 규모로 건설될 전망이다.
부산신항을 기점으로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일대의 2백10만 평 규모에 7천4백억 원을 투입한 녹산공단이 1990년 착공하여 1999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단에는 1천여 개의 기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며, 삼성자동차가 입주해 있다.
녹산공단에 이어 강서구 신호동 일대에는 신호공단이 조성되었고, 명지에는 대규모 주거지역이 조성되 있어 낙동강 하구일대가 공단의 배후주거지가 형성될 예정이다.
부산신항과 녹산·신호공단 그리고, 지사첨단과학단지 등을 연결하는 배후 산업도로망이 부분적으로 완공, 개통되었다. 배후도로가 완공되면 가덕도의 부산신항으로 수송된 컨테이너 물량이 녹산공단과 신호공단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망이 개설 중에 있다.
또 한편으로는 건설 중인 국내 최대 규모의 광안대로를 통하여 경부고속도로로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 부산시는 낙동강 하구지역인 서부산권을 공업지역과 항만물류지역으로 개발하고 동편인 해운대·송정을 거점으로 하는 동부권은 관광벨트로 개발하고 있다.
현황과 전망
4대강유역권의 개발로 국토개발의 웅지(雄志)가 전개되었던 낙동강유역권은 실로 국토개발의 가늠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유역권의 공업지구, 이를테면 구미·포항·울산·마산·창원·진주·사천 등은 낙동강을 전제로 도시화·공단화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유역권은 국내 최대의 공업지역으로 조성된 만큼 수질오탁(水質汚濁) 또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낙동강과 유역권개발에 철학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태계로서의 환경기준과 오탁원(汚濁源)으로서의 배출기준이 전 하천 유역에 걸쳐 전체적이고도 종합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낙동강의 경우 강원도·경상북도·경상남도의 3개도와 대구·부산의 2개 광역시를 흐르는 동안 각 행정 단위별로 단편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전유역이 일괄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은 낙동강홍수관리사무소가 담당하고 있는 홍수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낙동강은 각 지역에 필요한 물을 제공하여 주지만 일단 제공한 물이 사용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오탁된 상태로 되돌려받는다.
풍요를 구가하는 평야에서는 농약오염을, 또 물질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와 공업지역에서는 중금속의 하수와 폐수를 되돌려받는 고통이 따른다. 강연안의 개발이 어려운 점은 이와 같은 데도 있다.
낙동강의 개발에서 가장 큰 초점은 홍수를 자원화하는 데 있다. 낙동강을 통하여 흘러내리는 물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물이 홍수 때 일시에 바다로 흘러가 버린다.
따라서 다목적댐과 다목적저수지의 개발이 필연적이며 최우선순위로 지적되었다. 낙동강다목적댐의 주목적은 홍수조절에 있으면서도 홍수의 요보호지역(要保護地域)인 하류에서 댐의 적지(適地)를 찾을 수 없는 데 연안개발의 어려움이 있다.
또한 홍수관리의 어려움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물부족현상이다. 처음부터 수자원개발에 있어서 물이용의 형평을 유지하는 점이 구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했다. 최우선 순위를 용수공급과 홍수방지에 두고 있으므로 유역권의 물부족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하류지역, 특히 부산의 식수와 김해대동(大東)·대저(大渚)·녹산(菉山)일대의 평야에서는 갈수기의 물부족이 염수침입현상(鹽水侵入現象)으로 나타난 지 오래되었다.
대구시에서도 금호강의 오염으로 인하여 상수도공급에 타격을 받고 있다. 산업수준의 발달은 각종 용수의 급증현상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갈수현상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하류지역에 초당 40톤 정도의 유지수량이 흘러야 한다. 그러나 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는 유지수량이 초당 10톤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상류에서 초당 20∼30톤의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는 댐과 저수지가 세워져야 갈수기대책이 수립될 수 있다. 이보다 실질적인 문제는 물부족일수가 80∼240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장기간의 물 방류를 댐이 감당해낼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낙동강유역권은 개발의 측면에서만 다룰 수는 없다. 역사시대 이전부터 낙동강은 우리 문화가 싹터 온 요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원류가 강 연안 곳곳마다 서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문화적 유적을 보존하는 데도 중점이 주어져야 한다. 일찍이 우리의 불교문화를 정착시켰고, 조선유학이 크게 번성한 곳이 바로 낙동강유역이다.
강에서 조개를 잡던 태초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강과 연안을 면면히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 그와 같은 낙동강의 풍물들이 우리의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온 것이다. 개발은 그러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기 쉽다.
실제로 안동댐은 조선 유학의 고장들을 많이 수몰해 버렸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이 있다는 안동·예안·도산 일대의 많은 지역이 수몰된 것이다.
낙동강에는 동양 최대의 철새보호지역이 있는데, 하구 일대의 보호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낙동강 전수계(全水系)가 철새의 낙원이고 그곳에서 서식하는 모든 담수어의 요람이 될 때, 낙동강은 유역의 인간에게도 쾌적한 생활환경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가 살 수 없는 환경에서는 인간은 더욱 살 수 없다.
낙동강 하류는 물론 강연안 전체에 찾아들고 있는 철새떼가 모조리 발길을 끊었을 때 이미 그때의 환경을 다시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강의 개발, 더 나아가 국토개발에 철학이 요구되는 까닭은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