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반인들이 김해의 가락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 그대로가 사서에서 확인되는 용례는 아니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5가야에 금관(金官)이 들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였고, 「본조사략」에 금관을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는 여기에서 조합되기 시작하던 용어라고 볼 수 있다.
5가야조의 말미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금관'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금관가야는 고려에서 비롯된 조어였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 채록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가락국에 대한 명칭으로 가장 일반화된 것이기는 하나, 가야시대의 명칭은 아니다.
가야시대에 가락국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하였을 명칭은 「 가락국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불렀다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김유신비문」에 전하는 '가락구촌(駕洛九村)'의 '가락'과 같은 것에서 찾아야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가락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문헌사학계보다 고고학계에서 '금관가야'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김해의 가야 정치체의 국명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간 사회를 가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 구야국', 이후를 '금관가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기는 김해 지역의 경우, 3세기 후반대로 보고 있다.
가야의 연맹왕국 단계는 변한의 소국 단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국가권력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가 대형 분묘(김해는 초대형 목곽묘), 순장, 토기 양식의 출현 등이다. 김해 가야 세력이 소국 규모를 벗어나 연맹왕국의 맹주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증거가 초대형 목곽묘인 대성동 29호분의 등장이다.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의 성립은 변한 속의 병렬적 소국 단계인 '구야국'이 아니라 주변 소국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종속적인 지배 단계인 새로운 연맹왕국 단계로의 진입과 관련된다. 김해 가야 세력의 전성기에는 지금의 부산 및 창원 등의 동부지역을 통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에서 김해 세력을 중심으로 일정한 동질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의 성장 배경은 철 생산과 교역의 거점 역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3세기 후엽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도 확인되듯이 김해의 위치가 중국의 사신이 왜국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 거점이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의 왕성은 김해 봉황토성으로 추정되고 , 금관가야의 왕묘역은 대성동 고분군이다. 대성동 고분군의 묘제 변천은 기원전후서기 2세기 대의 목관묘, 서기 2세기 후반5세기 초의 목곽묘, 5세기~6세기 초의 수혈식 석곽묘의 순으로 전개된다.
금관가야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5만 군대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 남정(南征)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세기 이후에 아라가야나 대가야에서는 고총고분군이 축조되었으나 대성동고분군에서는 그러한 양상이 미약하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는 고구려 남정 사건 이후에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532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고학계에서는 금관가야 외에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라는 명칭도 맹주 세력과 소속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왕국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하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에서 각기 일정한 동질성이 보인다. 이렇듯, 고고학계에서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를 논할때 '□□가야'라는 명칭은 변한 소국에서 벗어난 연맹왕국 단계를 논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