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서기전 1세기~서기 6세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에서 형성된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존속하였다. 근래에는 전북특별자치도 동남부 일부 지역 혹은 전라남도 동부 일부까지 가야의 범주에 넣는 견해도 제기되며, 고대 한반도의 삼국에 이은 제4의 나라로 사국시대론이 주장되기도 한다. 가야의 기원은 삼한시대 변한 혹은 변진 12국 중 구야국이다. 해로상의 요충지로서 대방군에서 한반도 남부, 나아가 일본 열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해상 교통의 결절지였다.
가야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존속하였던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한 여러 나라들을 가리키는데, 근래에는 전북특별자치도 동남부 일부 지역 혹은 전라남도 동부 일부까지 가야의 범주에 넣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가야를 고대 한반도의 삼국에 이은 제4의 나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국시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달리 통일된 고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분립되어 있었다.
가야는 삼한시대 변한(弁韓) 12국 중 구야국(狗耶國, 狗邪國)에서 기원하였다. 변한은 변진(弁辰)으로도 불리는데 ‘변진구야국’ 또는 ‘구야한국’으로도 기록된 구야국은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있던 변한 소국 가운데 하나였다. 가야는 변한의 12소국, 소국 연맹체, 초기 고대 국가 등의 단계를 거쳤다.
가야의 문화 기반은 서기전 1세기 낙동강 유역에 세형동검(細形銅劍) 관련 청동기 및 초기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성립되었다.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중에 김해의 구야국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를 ‘변한 소국 연맹체’ 또는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 연맹은 4세기 말 5세기 초에 몰락하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이 나타났다. 5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22개의 소국이 형성되었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괄하여 초기 고대 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532년에 김해의 금관국(金官國)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 가나(駕那)설: 끝이 뾰족한 관책(冠幘)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2) 평야설: 남방 잠어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에서 왔다는 설, (3) 간나라설: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이라는 설, (4) 갓나라설: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갓나라[邊國]’로 불렸다는 설, (5) 가람설: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ᄀᆞᄅᆞᆷ[江]’ 또는 ‘가ᄅᆞ=갈래[分岐]’의 뜻이라는 설, (6) 겨레설: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다.
그 근원은 알타이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re) 〉 겨레(Kyeore)로 음운이 변천하였다는 설, (7) 성읍설: 가야는 곧 ‘ᄀᆞᄅᆞ[大, 長의 뜻]’이며, 그 어원은 ‘성읍(城邑)’의 뜻을 가진 ‘구루(溝婁)’라는 설 등의 여러 학설이 있다. 그 가운데 현재는 겨레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가야 계통 소국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지역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유하며 중심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낙동강 중 · 하류의 서쪽 지역 일대로서, 낙동강의 서쪽 지류인 황강과 남강 유역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땅이었다. 이러한 형세는 소백산맥 서부의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 전체에서 서남쪽 절반을 차지한 형세이다.
그러나 가야 전기에는 이보다 조금 넓은 영역을 차지하여, 낙동강 동쪽의 가지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야 후기의 전성기에는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호남 정맥(湖南正脈)을 경계로 삼아 금강 상류 지역과 노령산맥 이남의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 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가야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하여 낙동강변 및 남해안을 따라 분지 모양의 평야가 골고루 발달하였으며, 곳곳에 나지막한 지맥(地脈)이 뻗어 있어 광활한 평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지리적인 조건에 따라 둘로 나눈다면, 낙동강 하류 지역을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 지대와 낙동강, 남강, 황강 상류 지역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대로 나눌 수 있다.
가야 지역에는 질 좋은 철광산이 분포하였고 양호한 수상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이와 더불어 하류 지역의 김해 · 부산 · 양산 일대는 어로와 해운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합천 · 고령 · 성주 등의 중류 지역 일대는 안정적이고 양호한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지만, 제한적이나마 창원 · 고성 · 사천 등의 해안 지대는 해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산청 · 함양 · 거창 등의 산간 지역은 농경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낙동강 유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 지대에는 서기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및 철기 문화와 토기 문화가 유민과 함께 들어왔다. 2세기 중엽에는 그중에서 성장 속도가 빠른 김해 등지를 중심으로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김해 가야국 등 단위 소국이 출현하였다. 수로왕(首露王) 신화는 김해 지방 소국의 성립을 표방하는 정치 이념이었다.
이들은 2∼3세기에 걸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 소국 연맹 즉 전기 가야 연맹을 이루었고, 발전된 철기 생산 능력과 양호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발전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김해 가야국[狗邪國]과 함안 안라국(安羅國)이 우월하였다. 특히 해운 입지 조건이 좋은 김해의 가야국은 낙랑(樂浪)과 왜(倭) 사이의 원거리 교역 중계 기지로서 큰 세력을 떨쳤다.
변진 12국, 즉 전기 가야 12국에는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2) 접도국(接塗國), (3)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4) 고순시국(古淳是國), (5) 반로국(半路國), (6) 낙노국(樂奴國), (7)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8) 감로국(甘路國), (9) 구야국, (10) 주조마국(走漕馬國), (11) 안야국(安邪國), (12) 독로국(瀆盧國)이 있다.
이 중에서 거의 확실하게 위치가 비정되는 곳은 밀양 · 고성 · 김해 · 함안 · 부산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개연성이 높은 개령 · 고령 · 창원 · 칠원 · 단성 · 함양 등을 포함하여 보면, 변진 12국의 범위, 즉 전기 가야의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의 경역과 비교가 되면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이다.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보면, 전기 가야의 영역은 김해 · 창원 · 칠원 · 함안 · 밀양 · 부산 등의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고령 · 개령 등의 낙동강 중 · 상류 지역과 고성 · 단성 · 함양 등의 서부 경상남도 지역이 포함된다.
여기에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 관계 유적이 발견된 지역 중에서 위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합천군 · 성주군 · 의령군 · 진주시 지방을 전기 가야의 영역에 추가해 넣을 수 있다.
또한 창녕군과 양산군 일대는 진한 또는 신라와 관련된 기사에서 그 이름이 보이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는 때에 따라 가야 연맹 소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유적의 발견 사례도 없고 문헌 자료도 없지만, 그 외에도 거창군 · 하동군 등은 전기 가야 연맹의 영역 속에 포함된다. 이 밖의 영남 지역은 대개 진한 12국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3세기 후반 이후의 유적에서는, 길이 8m 정도의 대형 덧널무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유물로 청동솥[銅鍑],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 기승용 마구(騎乘用馬具) 등 북방 문화 요소를 부장하였다. 이러한 유물 · 유적 상황은, 유적 입지 조건이나 부장 유물의 수준으로 보아 정치적 지배 계급의 성장에 따른 좀 더 강한 국가체 출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낙랑 및 대방군을 병합하자 가야 연맹은 선진 문물 교역 대상을 잃게 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른바 ‘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고 불리는 고자국(古資國), 사물국(史勿國),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등이 김해의 가야국을 공격하는 내분을 겪기에 이르렀다.
가야국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포상팔국의 군대를 물리쳤으나, 연맹의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김해 중심의 동부 가야는 왜와의 교역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중 · 후반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대방군의 옛 땅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경쟁하기 위해 가야와 왜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백제가 교역로를 개척함에 따라, 가야 연맹은 다시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백제와 왜 사이의 중계 기지로서 안정적인 교역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야의 중계 역할은 부(富)와 기술과 무력을 모두 갖춘 데서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백제와 왜 사이의 교역을 위한 지리적 편의성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김해 가야국의 우월성은 철 생산과 철기 제작 기술, 무력의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김해 대성동 2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덩이쇠[鐵鋌]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 철제 재갈 등의 유물은 이를 보여 준다.
가야는 백제와 교역하는 대가로 왜와 함께 일부 동원되어 고구려의 동조 세력인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방의 안정에 힘입어, 백제는 황해도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후 황해도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 다툼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여파로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급습하였다. 고구려의 임나가라 정벌은, 신라가 가야보다 앞설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백제에게는 가야 지역을 중개 기지로 하는 대왜 교역망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해의 가야국을 대표로 하는 전기 가야 연맹은 소멸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 연맹권은 신라의 중앙 집권 능력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지역 기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나,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김해 지방에서 가야 연맹장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이 5세기 초 이후 급격히 축소되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반영한다.
5세기 전반에 들어 가야 제국은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그 기간 중에 창녕 · 밀양 · 부산 · 성주 · 개령 등지에 있는 세력이 거의 신라 세력에 동조하면서 가야의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고, 가야 연맹을 이끌 세력도 나타날 수 없었다.
5세기 중 · 후반에 가야 문화는 다시 부흥되었으니, 그 진원지는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이었다. 고령 · 합천 · 진주 · 산청 등은 안정된 천혜의 농업 지역이었으나, 4세기 이전에는 해운 교역 입지 조건이 불리하여 그다지 큰 문화 축적이 없었다. 그런데 5세기 초부터 경상남도 해안 지대에서 철기 및 토기 제작 기술이 이주민과 함께 파급되어 들어오면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이었으니, 이들은 철 생산이 풍부한 가야산의 야로(冶爐) 철광을 소유 · 개발함으로써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5세기 중엽에 이르러 반파국은 호남 동부 지역을 포섭하여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교역 중심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령 세력은 옛 가야 지역을 상당히 복구하며 ‘대가야국’으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소국을 포괄하는 연맹체, 즉 후기 가야 연맹을 형성시켰다. 김해 금관국 수로왕을 동생이라고 지칭하는 대가야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신화는 그 당시에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가야는 475년 백제 한성(漢城)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좀 더 강화하였다.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는 479년에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교역하여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 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또한 가야는 481년에는 백제와 함께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 미질부(彌秩夫)까지 쳐들어온 고구려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5세기 후반 및 6세기 초에 후기 가야 연맹이 가장 번성하였을 때, 그 영역은 거창과 함양을 거쳐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을 섭렵하였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삼아 신라와 대립하였다.
『삼국사기』와 『양직공도(梁職貢圖)』 그리고 『일본서기』 등에서 확인되는 후기 가야 소국으로는 (1) 가라국(대가야국), (2) 안라국, (3) 사이기국(斯二岐國), (4) 다라국(多羅國), (5) 졸마국(卒麻國), (6) 고차국(古嗟國), (7) 자타국(子他國), (8) 산반하국(散半下國), (9) 걸손국(乞飡國), (10) 임례국(稔禮國), (11) 남가라국(南加羅國), (12) 탁순국(卓淳國), (13) 탁기탄국(㖨己呑國), (14) 거열국(居烈國), (15) 사물국, (16) 대사(帶沙), (17) 상기문(上己文), (18) 하기문(下己文), (19) 상다리(上多唎), (20) 하다리(下多唎), (21) 사타(娑陀), (22) 모루(牟婁) 등이 있다.
즉 전성기의 후기 가야 연맹은 영남 지역의 16개 소국과 호남 지역의 6개 소국을 합하여 모두 22개 소국을 아우르고 있었다. ( 후기 가야 연맹의 최대 판도)
그러나 6세기 초에 백제는 무령왕대를 맞이하여 남진 정책을 추구하였다. 특히 섬진강 하류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 체계를 만들고자 한 백제는 가야 연맹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대가야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결국은 백제의 공세에 밀려 호남 동부 지역을 상실하였고, 대사(帶沙)와 자타(子他) 등지에 성을 쌓아 백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522년에 신라에게 청혼하여 결혼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이 동맹은 깨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가야 연맹 내부에는 분열의 조짐이 생겨났다.
이를 알아차린 신라는 무력 공세를 하여 영산의 탁기탄국에게 항복을 받아 냈으며, 뒤이어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남가라국)이, 530년대 후반에는 창원의 탁순국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러자 백제도 군대를 투입하여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乞乇城)과 칠원의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다.
6세기 중엽에 후기 가야 연맹은 고령 대가야국과 함안 안라국 중심의 남북 이원 체제로 분열된 채, 백제와 신라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아 범 가야권은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막고 독립적 존재로 남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백제 성왕의 외교적 공세에 굴복하여 550년경에 그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 무렵 대가야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554년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에게 패배하자, 가야 연맹 소국들은 백제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씩 신라에 기울어 갔다. 그 후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의 급습으로 멸망하면서 가야 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가야는 왜 멸망하였는가? 가야고분 유적에서는 백제나 신라의 고분에 비해 수많은 철제 무기나 갑주(甲冑)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째서 신라에게 일찍 망하였을까? 가야의 직접적인 멸망 원인은,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이끄는 2만 대군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한 데 있다. 이때 신라가 화랑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미리 기병 5,000명으로 대가야를 공격한 것은 일종의 기습 작전이었다.
그러나 대가야가 이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은 단기간의 실정 때문만은 아니다. 가야가 총체적으로는 약하지 않았으면서도 신라에게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야 지역에는 거의 모든 군이나 면의 야산마다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이 고분군들은 대개 5~6세기의 것들이다. 그 안에서 토기나 철기를 포함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가야 문화의 힘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입지 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독자적으로 비교적 고르게 문화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야 연맹 초기에 김해의 가야국이 상대적으로 우월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소국들을 도태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멀리 앞서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김해 · 부산 · 창원 · 함안 · 고령 등의 세력은 타 지역에 비해 입지 조건도 좋고 문화 능력도 우월하여,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였다.
둘째, 가야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경상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하였다. 또한 선진 문물의 창구인 한반도 서북부 및 중부 지역까지의 교통 · 해운 조건이 좋은데다가 남쪽으로는 왜와의 교역 창구를 이루고 있어서, 그 이권을 노리는 외부 세력이 많았다. 특히 가야는 4세기 말~5세기 초에, 낙동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경쟁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를 끌어들여 가야의 문화 중심이었던 김해 지방을 공격하였고, 고구려 군대의 힘을 빌어 가야 지역을 한동안 감시하였다. 그로 인하여 가야는 국제 사회에서 한동안 고립되었으며, 이러한 고립은 가야가 발전하는 기세를 막는 결과로 작용하였다.
셋째,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가야는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어졌다. 5세기 중엽에 고령 대가야 중심의 소국 연맹 체제가 다시 형성되었지만, 그동안 백제와 신라에게 뒤떨어진 간격을 만회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가야 연맹은 그들에 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마련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6세기에 들어 백제나 신라로부터 여러 가지 도전이 닥쳐왔지만, 가야는 외부 세력을 하나로 된 외교 창구로 대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효과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비능률적이어서 자신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가 어려웠다.
넷째,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풍부한 철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를 개발하여 철을 팔아 낙랑이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다. 또한 왜보다 철 소재 자원 보유면이나 철기를 제작하는 기술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왜는 3∼5세기까지 대부분의 철 소재를 가야 지역에서 얻어다 쓰고 있었으나, 5세기 말 이후에는 철광산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가야는 6세기 이후로는 제철 능력 면에서 왜에게 갖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선진 문물 측면에서 가야보다 우월한 백제가, 전라남도 방면을 통하여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가야의 입지적 우월성은 더욱 타격을 받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요인은 서로 연관되어 가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야가 백제와 신라 등의 주변 국가에 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 마련이 상대적으로 늦어져서, 대외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2~3세기에 변진 12국은 각기 2,000호 정도를 지배하는 독립 세력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규모에 차이가 있었다. 하나의 소국이 2,000호라면, 그 인구는 1만 명 전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정도의 규모를 하나의 ‘국가’로 보기에는 조금 미흡하다. 하나의 소국은 일률적인 규모가 아니어서, 소국에 따라 최대 5,000호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고 최소 600호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전기 가야 소국들 내부의 사회 구조는 어떠하였을까? 3세기의 변진 소국, 즉 전기 가야 소국의 내부 구조는 하나의 국읍(國邑)과 다수의 읍락(邑落)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읍의 주수(主帥)가 각 읍락의 거수(渠帥)들로부터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였고, 또한 천군(天君)의 종교적 권위를 초월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각 소국은 자기가 통합하고 있는 지배 영역을 쉽사리 확장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소국들은 내부 구조의 면에서 일단 권력자가 출현하고 정치적 · 종교적 권위가 분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아직 중앙 집권화의 정도가 미흡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앙 집권화에 이르기 위한 조건, 즉 사회 경제적 계급의 분화, 관료제의 제도화, 중심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 등의 요소를 구비하였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다.
이에 비해 후기 가야 소국들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가야 연맹체의 영역이 전기에 비하여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후기 가야에서 평상시 소국의 수효가 13개 정도에 달하여 전기 가야 소국의 12국과 비슷하였던 것으로 보아, 소국의 규모도 전기에 비해 큰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다만 6세기의 가야 지역 소국은 하나의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기본적인 지배 권력은 각 소국 한기(旱岐)에게 분산되어 있으나, 대가야국(가라국) · 안라국 등의 일부 소국에서는 미약하나마 한기층의 분화에 따른 관등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기 가야 소국들은 기본적으로 전기 가야 소국들과 거의 비슷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나, 맹주국은 그보다 발전된 면모가 어느 정도 인정된다.
변진 소국, 즉 전기 가야 소국들은 마한이나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각기 국명을 사용하여 인정받고, 그 안에 지배자 또는 대표자가 1인 존재하는 독립적 정치 집단이었다.
소국의 크기에 따라 자신들이 부르는 지배자의 호칭에 차이가 있어서,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 다섯 등급의 칭호가 있었다. 이처럼 변한 소국의 지배자들 사이에 상호 간의 서열 관념이 매우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아, 변진 소국들 사이에 연맹체 조직의 질서가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한, 즉 마한 · 진한 · 변한은 서로 구분되는 정치 집단인데, 진한과 변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하는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진왕에 속하였다는 12국은 변진 12국이며, 진왕은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왕이다.
진왕은 독점적인 지배 권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지위라기보다는, 여러 소국 신지들이 선출하여 결정되는 존재였다. 이는 중국 군 · 현과 대등한 크기의 교역 주체를 내세우기 위해 삼한 소국들이 만들어 유지하였던 제도였다.
변한 소국 연맹체 내에서는 김해의 구야국 신지와 함안의 안야국 축지(踧支)가 가장 서열이 높아서, 진왕이 중국 군 · 현과 교섭할 때 변한 지역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그 둘의 직함을 뒤에 덧붙여야 하였다. 따라서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따라야만 하였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변진 12국은 위(魏)나라와의 통교를 위하여 형식상 진왕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구야국과 안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마한 · 예(濊) · 왜 · 낙랑군 · 대방군 등과 상호 교역하는 등 독자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다만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보다는 구야국이 좀 더 우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실력 차이가 후대 사람들의 인식에 남아『삼국유사』의 수로왕 신화와 5가야 조에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6가야 연맹의 전승을 남기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3세기 전반에 변진 12국은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 연맹체, 즉 전기 가야 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가야 소국들 상호 간의 관계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 조와 5년(544) 11월 조에는 ‘사비 회의’ 관련 기사가 나온다. 기사를 살펴보면 가야 연맹 제국이 백제와의 대외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정한 관등을 가진 단일의 외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7~8개 소국의 대표들이 함께 행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국들에서 파견된 대표자들은 가야 연맹 제국이 공동으로 파견하여 실무를 처리하는 사신단이었으며, 사료상으로는 이들을 ‘집사(執事)’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야 연맹 집사들은 연맹체의 일을 처리하는 상설 기구는 아니었고, 대외적인 중대사가 있을 때 결성되는 임시 회의체였다.
소국들이 파견한 가야 연맹 집사들의 직함은 소국에 따라 달랐다.
졸마국, 산반해국(散半亥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자타국, 구차국(久嗟國) 등은 이름 없이 단순히 한기나 군(君) 또는 그 아들 등으로 나타나 있다.
안라국, 가라국(대가야), 다라국, 자타국 등은 차한기(次旱岐), 하한기(下旱岐), 상수위(上首位), 이수위(二首位) 등이 그 이름과 함께 나타나 있다.
이로 보아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나 신라 등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인식되었으나, 제국 내에는 연맹 전체를 통괄하는 중앙 집권적인 관직 체계가 있지 않고 각국이 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 소국들 중에서 안라와 대가야에는 다른 소국의 한기층보다 우월성이 인정되는 ‘왕’의 칭호가 공식화되어 있었고, 두 왕이 가야 소국들 전체에 대한 최고 의사 결정권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안라왕과 가라왕은 그 소국 한기들에게 가야 지역 전체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백제나 왜에게는 임나, 즉 가야 연맹의 대표자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6세기 중엽 당시에 안라와 가라는 대내적 · 대외적 양 측면에서 보아 가야 지역의 소국들 전체에 대한 공동 맹주의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야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 논의되어야 할 핵심은, 소국들이 상호 간에 연맹 체제를 이루고 있었는가 또는 고대 국가를 이루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 이래로 막연하게 이른바 ‘6가야’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설이 통용되고 있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이 표출되었다.
5~6세기 후기 가야 문화권은 고령권, 함안권, 고성 · 진주권, 김해권 등 4개 권역으로 나뉘고, 각 권역은 상호 간에 서로 다른 특징과 발전 과정을 보인다. 그리하여 후기 가야 문화권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분립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견해로는 ① 가야 단일 연맹체론, ② 가야 소국 분립론, ③ 대가야 연맹론, ④ 가야 지역 연맹체론, ⑤ 대가야 고대 국가론 등이 있다. 이런 견해들로 보아, 가야 연맹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이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설부터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설, 그대로 인정하는 설 등이 대립되어 있고, 대가야는 이미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고 하는 설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 유물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편년을 조정하고 문화권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토대로 삼아 5~6세기의 가야 지역을 4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이루어진 중요한 연구 성과이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자들이 거시적인 시각을 견지하지 못하여 백제 · 신라 · 왜 등과 달리 가야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 또는 가야 문화권의 공통적 성격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가야 지역 전체에 미치는 단일 연맹체의 존재를 주장한다고 해서, 지역 연맹체의 개념이나 존재에 대하여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가야 지역 내에 존재하는 4개의 토기 분포권은 상호 간에 동질성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고, 그 문화적 성격이 신라나 백제의 토기 문화권과는 더욱 크게 차이가 난다.
또한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문헌 사료에서도 이들을 하나의 단위로 서술하는 기사들이 확인되므로, 역시 이들을 하나의 연맹체로 인정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소지역권이 구분되는 것은 연맹체에 특유한 분절 체계의 존재 양상일 뿐이다.
가야는 과연 소국 연맹체를 넘어 좀 더 발전하여 초기 고대 국가 단계에 해당하는 부체제(部體制)를 이루었을까? 고대 국가의 성립을 말하려면 왕권이 무력을 독점하였는지의 여부와 관등제가 존재하는지의 유무를 확인하여야 한다. 가야사에서 국가 형성과 관련된 논의의 대부분은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가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479년에 가라왕 하지가 머나먼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가야의 발전 도상에 매우 중요한 도약을 시사하고 가야가 초기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단서를 보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가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이 그 뒤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한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것만으로는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우선 왕권이 무력을 독점하였는가의 여부는 가야의 각 지방 고분군에 보이는 유물의 부장 상태와 문헌상의 전쟁 상황 등을 고려하여 검토해야 한다.
『일본서기』 계체기 8년(514) 조 기사로 보아, 반파는 자탄(子呑)과 대사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에 이어지게 하고, 봉수대와 저택을 설치하여 백제 및 왜국에 대비하였다. 또한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 및 추봉(推封)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를 핍박하였다고 한다. ( 6세기 초 대가야의 사방 축성)
여기서 반파가 성을 쌓은 위치가 고령에서 멀리 떨어진 점이나, 사졸과 병기를 모았다는 표현으로 보아, 대가야국은 연맹의 수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지방에서도 노동력이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대가야의 왕권이 강화되어 넓은 영역에 걸쳐 무력을 독점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인정해도 좋다. 이는 대가야가 백제와의 영역 다툼 과정에서 가야 북부 지역에 걸쳐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고고학적 유물에서 고령 양식 토기의 확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가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시켜 일원적인 관등제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다원적인 관등제라고 하더라도 왕 우위의 관등 서열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540년대의 ‘사비 회의’ 관련 기사로 보아, 가야 연맹 제국은 백제와의 대외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정한 관등을 가진 단일의 외교 사신을 백제 도성에 파견한 것이 아니라, 7~8개 지역의 대표들을 함께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비 회의에 모였던 가야 연맹 집사들은 외교를 위해 신라를 방문하였고, 대가야(가라)나 안라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대가야나 안라에서 회의를 하면 대가야 왕이나 안라 왕도 참석하여 제한기 회의(諸旱岐會議)의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만약 훗날 대가야가 성숙한 고대 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사서를 남길 수 있었다면 510년대 이후의 소국들을 ‘부(部)’라고 표기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 강력한 연맹, 즉 실질적인 부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야 제국 전체로 보았을 때는 아직 소국 연맹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남부 가야 제국들은 5세기 이래 2~3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을 유지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대가야의 왕권이 좀 더 공고하였다면 얼마 안 있어 이를 통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29년 안라 회의 이후, 대가야는 가야 남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가야는 대가야-안라 남북 이원 체제로 분열되었다. 가야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대외적으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취급되었으나, 그 내부에서는 필요와 상황에 따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분절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가야는 510년~529년까지 이미 상당한 범위에 걸친 부체제를 구축하여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이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530년대 이후 다시 연맹체 수준으로 분열되었다가 562년에 멸망한 것이다.
가야 지역은 경남 해안 지대와 낙동강을 끼고 있으므로, 가야인의 생업 경제에서 어로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진 · 변한의 해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문신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활발한 어로 생활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야 지역의 어로 생활 유적인 패총(貝塚), 즉 조개무지에는 부산시 영도구 조도 패총, 창원시 성산 패총, 김해시 봉황동(구 회현리) 패총, 부원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양산시 양산 패총 등이 있다.
패총 문화는 가야 지역에 철기문화 요소가 나타나는 서기 전후 무렵부터 5세기 정도까지 존속되었던 생활 유적인데, 그 중심 연대는 3~4세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패총 문화의 기본 요소로는 굴 껍질을 비롯한 수많은 조개껍데기, 실을 뽑는 데 쓰는 가락바퀴, 그물 끝에 매다는 어망추 등의 토제품과 각종 골각기, 그리고 쇠손칼, 쇠낫, 쇠화살촉, 쇠낚시바늘 등의 철기류를 들 수 있다.
후기 패총 문화를 영유한 주민들의 음식물 종류를 본다면, 김해 부원동 A지구 패총에서 출토된 종류만 보더라도 벼 · 보리 · 밀 · 콩 · 조 등의 곡물과 굴 · 털조개 · 긴고둥 등의 해산물이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시기의 패총 주민들은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농경과 어로를 함께 해 나갔던 것이다.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의 5세기 후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뚜껑 달린 굽접시[有蓋高杯] 속에 낙동강 및 그 지류의 민물고기인 누치, 남해 바다의 산물로 보이는 두드럭고둥, 소라, 게와 대구, 청어 등의 생선뼈가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가야의 어로 산업은 후기 가야 시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생업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의 경제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 생산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 한반도에서는 보리 · 콩 · 팥 · 조 · 수수 · 기장 등 오곡이 재배되었으며, 벼농사도 확산되어 나갔다. 영남 지역에는 고령 양전동, 산청 강루리, 진주 대평리, 울산 검단리 등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농경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입지 조건 자체가 농경에 알맞은 구릉지대로 올라오고, 거기서 밭 유구, 탄화미, 볍씨 자국이 찍힌 민무늬토기 등이 나타나서, 주민들이 거의 전업적인 농경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농업은 산간의 정리된 농경지에 불을 놓아 파종을 하고,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휴경을 하는 화전 윤작이었으나, 민무늬토기 중기 이후로는 본격적인 논 벼농사와 함께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곡물의 수확 용구로 반달칼과 돌낫을 사용하였으며, 그 외에도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모양의 간돌도끼를 만들었다.
돌도끼들은 나무를 다듬어 따비, 보습, 괭이 등의 목제 농기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고, 직접 나무를 베고 나무뿌리를 캐서 농경지를 정리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서기 전후가 되면, 경남 지역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나온 수많은 철제 손칼과 각종 도끼, 쇠괭이, 쇠따비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농업은 논을 일군 다음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물을 대고 파종을 하는 집약 농업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전반의 삼한 사회에서는 오곡과 벼를 재배하고,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재배할 줄 알아, 여러 종류의 비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5월에 각종 작물을 파종하고 난 후와 10월에 추수를 마친 후에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모두 모여 춤을 추고 술을 마신다고 하였다. 이들은 안정된 농경 기반을 가지고 자유로운 읍락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이후 이 지역 농민들의 생산력은 꾸준히 늘어 일반 농가에서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으나, 주조 쇠도끼, U자형 쇠삽날, 쇠스랑 등은 묘광(墓壙) 크기 4㎡ 이상의 중대형 분묘에서만 1~2자루씩 나왔다. 이는 가야 지역의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농업이 지배 세력의 선도 아래 발전하고, 또 통제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다.
즉 대형 철제 농기구들은 철기 제작 전문 집단을 보유하고 있던 최대 국읍인 김해 가야국의 왕에 의하여 각지의 소군장(小君長)들에게 분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5~6세기 무렵의 백제나 신라에서는 중앙 정부가 주도하여 제방 등 수리 시설을 확대하여 대규모의 논을 개발하고, 소를 이용한 경작, 즉 우경을 시작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여 나갔다. 당시의 가야는 아직까지 지방 소국들의 독립성을 제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 대형 토목 사업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후기 가야의 중심인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 중에서 가야천 유역의 성주 · 고령 · 합천과 지리산 주변의 진주 · 남원 등은 한반도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조선시대 후기에도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가장 높으며 농업용수가 풍부해서 가뭄 피해를 겪지 않았으며, 안음 · 거창 · 함양 · 산음 등도 상당히 비옥하였다.
아직 수리 제어 기술이 미흡해서 산간 지류 등을 이용하여 농경을 하는 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 일대가 최상의 안정적인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해서 가야 연맹이 재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곡물 종류를 보면, 벼 · 기장 · 보리 · 조 · 밀 · 콩 · 팥 등이 있다. 또한 그동안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동물 뼈 중에서 사슴 · 노루 · 멧돼지 등은 수렵으로 잡은 것이나, 개 · 돼지 · 소 · 말 · 닭 등은 사육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가야의 농업은 다양한 곡류의 재배뿐만 아니라 여러 가금류를 기르는 목축도 함께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고대의 경제에서 교역의 중요성은 매우 크나, 가야의 경우에는 특히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원거리 교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인들이 교역에 활발한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양호한 해상 운송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운의 면에서 볼 때, 3세기에 낙랑에서 배가 출발하여 서해와 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데 김해의 구야국에 들른 뒤 해협을 건너 왜로 향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철 생산과 해상 운송의 두 가지 점이 연결되어 당시의 경상남도 해안 지대인 변진에서는 철을 생산하여 한, 예, 왜 및 낙랑군, 대방군과 활발하게 교역하여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다.
3세기 이전에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내행화문 거울[內行花文鏡], 사유조문 거울[四乳鳥文鏡], 오수전(五銖錢), 왕망전, 청동 세발솥[銅鼎]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입증해 주는 것들이다. 반면에 왜와의 교역 또는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주는 왜계 유물로는 자루입술 토기[袋狀口緣土器], 이단입술 항아리[二段口緣壺形土器], 폭넓은 청동 투겁창 등이 있다.
한편 3세기 이전의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한국계 유물로는 독무덤[甕棺墓], 널무덤, 세형동검, 청동 투겁창, 청동 가지창, 잔무늬거울[多紐細文鏡], 갈색 덧띠토기, 회색 와질토기 등이 있다.
서기 2~3세기의 일본 출토 한국계 유물은 대부분 규슈[九州] 북부에서 출토되나, 3세기에는 한국계 유물의 출토 범위가 산인[山陽], 산요[山陰], 긴키[近畿]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 열도로 전해진 유물 중에는 중국 · 낙랑 계통의 청동 거울, 벽(璧), 오수전 등도 있다.
문헌과 유물상의 이러한 증거를 종합하여 판단할 때, 경상남도 해안 지대의 가야 제국, 특히 김해 가야국은 낙랑의 무역 중계 기지 역할을 하였다. 즉 당시의 가야는 낙랑에서 무기나 귀중품 등을 사다가 낙동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경상도 내륙 지역 곳곳 또는 규슈 등의 왜지(倭地)에 팔아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보았고, 그러한 교역은 그들의 철 생산과 어울려 더욱 큰 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낙랑군이 약화된 3세기 말~4세기 이후에는 크게 보아 서북한 지역과의 교역이 지속되면서 일본 열도와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당시의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서북한 방면 유물로는 방격규구사신 거울[方格規矩四神鏡], 굽은 칼[曲刀], 청동제 호랑이 모양 띠고리[虎形帶鉤], 청동솥 등이 있다.
4세기 가야 지역의 왜계 유물로는 내만구연 항아리[內彎口緣壺], 하지키 파수부 항아리[把手附壺], 바람개비 모양 방패꾸미개[巴形銅器], 벽옥제 돌화살촉, 가락바퀴 모양 석제품, 돼지이빨 팔찌 등이 있다.
한편 일본 긴키 지역에서는 원통형 청동기[筒形銅器], 덩이쇠, 철제 판갑옷 등의 가야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5세기로 이어지는 일본 고훈[古墳]시대 중기에는 낙동강 서안 가야 지역의 도질토기를 본받아 만들어진 스에키[須惠器], 가야 계통의 철제 판갑과 마구 등과 같은 실용적이고 전투적인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이 등장하며 일본 고대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5~6세기 후기 가야의 교역은 전기만큼 활발하지 못하여, 중국 계통의 유물로 보이는 것이 전기 가야시대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반면 왜와의 교역은 김해를 대신하여 고령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나갔다.
5세기 후반의 일본 열도 각 지역의 유력한 수장묘에 대가야 계통의 위세품으로 보이는 단면 팔각형 쇠투겁창, S자형 말재갈, 용문 투조 허리띠 장식, 산치자형 수하식 달린 금귀걸이, 검릉형 말띠드리개, 말투구 등이 주류를 나타내고 있다.
고령 양식 토기들도 일본 규슈 및 세토나이해 연변 각지에 널리 분포되었다. 또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오키나와[沖繩]산 야광패제 국자와 왜 계통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어, 왜의 물품이 가야 지역에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대가야가 중국이나 왜와 무역하는 교통로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방을 이용하기보다는 서쪽의 하동 방면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는 위와 같은 위세품과 합천 야로 지방의 철과 같은 물품의 유통권을 대내적으로 장악하는 한편, 대왜 교역 창구를 일원적으로 독점하게 되면서 가야의 맹주적 존재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다만 전 시대와 같이 유리한 수운을 가진 낙동강 하구를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은 대외 교역상의 큰 한계였다.
2~3세기 당시 삼한 사람들의 복장을 살펴보면, 구슬을 보배로 여겨 옷에 꿰매 장식으로 삼고, 혹은 목에 걸거나 귀에 걸면서도, 금은이나 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고, 맨머리에 상투를 드러내서 굳센 병사 같았으며, 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었다고 하였다. 또한 누에치기를 잘하여 겸포(縑布) 등의 비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여기서 구슬을 귀하게 여겨 몸에 치장하고 가죽신을 신는다는 것은, 이미 사치품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의 복색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므로, 그들의 사치품 수요는 단지 중국 물품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가 아니라 자생적 계급 성장에 따라 유발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가야 지역의 인공으로 만든 유리구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전 1세기경의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남색 유리 둥근 구슬[丸玉]과 고리 구슬[環玉]들이다. 2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 427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것도 대동소이하다. 이 구슬들은 아직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2세기 후반 및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덧널무덤들에서 출토된 구슬들은 다량의 남 · 청 · 홍색 유리제 구슬과 대형 수정제 곡옥(曲玉), 절자옥(切子玉) 등이 연결되어 연장 총 길이가 288㎝에 달하는 것도 있고, 남색 유리구슬 수백 점 외에 수정제 곡옥 148점, 대형 다면옥(多面玉) 2점으로 구성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이런 정도의 장신구를 일반인들도 소유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늦어도 3세기 전반에는 사회경제적으로도 일반민과 구별되는 귀족 계급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구슬을 이용하여 부를 표시하려는 관습은 4세기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야에서 전형적인 귀금속 유물들이 출토된 것은 5세기부터이다.
이 시기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는 용봉문 고리자루 큰칼[環頭大刀], 은 상감 삼엽문 고리자루 큰칼, 금동제 마구 장식, 화살통 장식, 안장가리개, 말띠꾸미개, 관못, 여러 가지 형태의 수하식(垂下飾) 달린 금귀걸이, 순금 곡옥, 초화형 장식판[草花形立飾]을 세운 금관, 가운데에 큰 화염형 문양을 하나 세운 금동관, 금제 팔찌, 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것들로 보아, 5세기 이후에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에서 관(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뿐만 아니라, 대도, 마구, 관(棺) 등의 소품들도 금이나 금동,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장식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5~6세기에는 가야 지역에 사회경제적인 부에 바탕을 두고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장(殉葬)이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말한다. 순장 그 자체는 하나의 장례 풍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 즉 예속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시행 여부가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되기도 한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는 전형적인 순장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순장 사례는 대략 4세기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확인되었다. 묘제 상으로는 나무덧널무덤, 움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덧널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연맹장(왕)을 비롯한 가야 소국들의 최고 지배층이 순장 시행의 주된 집단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순장의 사례를 통하여 가야 사회가 왕이나 소국 지배층을 비롯한 귀족과 평민 및 노예 등의 3계층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장이 실시된 것을 가지고 고대 노예제 사회나 전쟁 노예의 성행을 추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순장은 왕이 천신(天神)의 후손으로 여겨지던 세계관과 관계가 깊으며, 당시의 왕권은 주민들의 반(半) 자발적 복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순장제는 전형적인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초기 국가나 그 이전의 소국 연맹체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순장제가 성행하였던 것도, 각 단위 소국 한기의 권력 및 연맹장의 권력이 강화되었지만 아직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륵은 6세기 무렵 대가야의 악사로서, 원래는 성열현(省熱縣), 즉 후기 가야 연맹에 소속된 나라의 하나인 사이기국 사람이었는데,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고령 대가야에 들어갔다. 우륵은 가실왕이 중국 남제와의 교역에서 얻은 쟁을 개량하여 만든 12현금, 즉 가야금을 가지고 12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이,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한째는 이사, 열두째는 상기물이다. 12곡 중에 보기와 사자기는 기악곡으로서, 보기는 여러 개의 공을 돌리는 기예를 보일 때 연주하는 음악이고, 사자기는 사자 모습의 탈춤놀이를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인데, 우륵이 이들을 가야금 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나머지 10곡은 5~6세기의 대가야 중심 가야 연맹 소속국들의 지방 특색이 있는 고유 음악을 정리하여 가야금 곡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중에 하가라도와 상가라도는 각기 전 · 후기 가야 연맹의 수도인 김해와 고령 지방, 4곡은 경남 지역 소국, 나머지 4곡은 호남 동부 지역 소국의 음악이다. (우륵 12곡명이 가리키는 가야 제국의 위치)
우륵 12곡은, 후기 가야 연맹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전통적인 의례를 행하는 날에 각 소국의 한기들이 대표로 대가야의 궁정에 모여 연주하던 음악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곡들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의 단결과 강성함을 상징하는 음악이다.
12곡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510년대설, 520년대설, 530년대설, 540년대설 등이 있다. 530년대설 또는 540년대설은 위기에 빠진 대가야가 전성기를 회고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그렇다면 우륵 12곡에 가야 연맹의 주요 소국들의 이름이 망라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한 가실왕이라는 인명과의 관련이나,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도 그런 곡을 만들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가야 연맹의 유력한 소국들인 안라국, 다라국, 고자국 등의 음악이 빠진 것으로 보아, 우륵 12곡은 후기 가야 연맹 전성기에 열린 한 의식의 기록이고, 이를 통해 맹주국 대가야의 명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530년대 이후로 후기 가야 연맹이 분열과 쇠퇴를 되풀이 하다가 결국 550년경 백제에게 부속되는 지위로 전락하자, 대가야의 앞날을 비관한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551년에 신라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 안치시키게 하고, 552년에 대나마 계고(階古), 법지(法知) , 대사 만덕(萬德) 세 사람을 보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후에 진흥왕은 그들의 음악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훗날 문무왕이 충주에서 긴주(緊周)의 아들이 추는 가야의 춤을 구경하였다는 것은, 우륵이 국원에 머물면서 가야의 음악을 전수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륵의 제자인 이문이 지은 가야금곡으로는 까마귀[烏], 쥐[鼠], 메추라기[鶉] 등 3곡이다. 이는 동물의 소리나 행동을 가야금 선율로 묘사한 서정적인 곡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본 나라현 도다이지[東大寺]의 보물 창고인 쇼쇼잉[正倉院]에 823년에 수납되어 전하는 신라금(新羅琴) 2대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금물 칠한 신라금’으로서 신라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우륵이 신라에 전한 가야금의 후신이니, 현존하는 가야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다.
가야 지역의 사상에 대해서는, 1세기의 김해 가락국(가야국) 건국 초기에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여 싣고 왔다는 파사 석탑 및 왕후사 건립과 관련하여, 인도 지역의 남방 불교가 이곳에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려 있는 금관성 파사 석탑 조의 기록을 따르면, 파사 석탑은 서기 48년에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에 가지고 들어왔으나 아직 불교로서 이해되지는 못하였고, 452년에 호계사를 창건하여 파사 석탑을 안치하고 또 왕후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파사 석탑은 인도에서 들여온 것이기 때문에, 당시에 남방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유타국이라는 이름은 5세기 이전의 가야에서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인도에서도 불교적으로 가장 인연이 깊은 나라였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하여 허왕후 결혼 설화 속에 삽입되었으며, 그 시기는 왕후사가 창건될 당시인 신라 중대였을 것이다.
무열왕계의 김씨가 신라 왕실을 운영하던 신라 중대는 가야계의 신김씨가 가장 왕성하였던 시기였고, 그때 가야 왕실의 후손들은 신라 왕실의 비호를 받아 금관소경의 우월성이 강조되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윤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김해 호계사에 있었다는 파사 석탑 설화의 성립 시기는 좀 더 늦어 고려 초기, 또는 중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파사 석탑을 허왕후릉 묘역 안의 전각에 보존하고 있다. 파사 석탑의 현재 모습은 네모난 모습의 돌들이 포개져 있고, 돌의 재질도 화강암이 아니라 매우 무른 특이한 종류여서, 일반적인 한국 석탑의 계보를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대가야가 불교를 수용하였는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불교식 인명들이다. 대가야 왕계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어머니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나오고, 6세기 당시 대가야 왕이었던 이뇌왕(異腦王)과 왕비인 신라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 사이의 아들인 월광태자(月光太子)가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불교식이다.
정견모주의 ‘정견(正見)’은 불교에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행 방법인 팔정도(八正道) 첫 번째 단계의 이름이다. 또한 ‘월광태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국왕의 아들로 태어나 선행을 베풀었을 때의 이름이다. 이는 불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진 시대의 관념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야의 불교식 이름은 언제 나타났을까?
가야산 해인사는 신라 하대 애장왕 때에 대가야 왕족의 후손인 순응과 이정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제사 터를 확장해 창건한 것이다. 현재 해인사 안에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정견천왕사’라고 불리던 ‘국사단’이라는 건물이 있다.
가야 연맹의 제사는 맹주국인 대가야국에서 각국의 대표자인 한기들이 모여 공동으로 행해졌는데, 제사 행렬은 가야 연맹의 성소(聖所)인 가야산 정견모주 사당에서 시작되어 고령 읍내로 이어졌을 것이다.
6세기 전반 당시 대가야의 사회 발전 수준이 불교를 받아들여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정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주변국인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및 침류왕 때부터 불교를 인정하였고, 신라에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 이후 고구려의 승려들이 왕래하였으므로, 가야인들도 불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가야 이뇌왕은 522년에 신라 법흥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밀접하게 교류하던 중에, 528년에 불교를 공인한 신라를 통하여 불교를 수용하였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뇌왕의 아들 도설지를 월광태자로 명명한 것과 함께 대가야 왕계의 인명을 불교적으로 윤색한 시기는,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은 522년 이후 562년 멸망하기 전까지로 추정된다.
또한 대가야의 불교 수용 문제는 중국 남제 · 백제와의 교류와 연관하여 생각할 필요도 있다.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을 개연성으로는 첫째로 우륵 12곡 가운데에 ‘사자기(師子伎)’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중국 남조의 기악(伎樂)인 사자춤에서 사자는 부처님이 보낸 것이기도 하고 그 춤 자체가 사원에서의 장례나 법회에 쓰이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가야는 백제를 통해서 불교를 받아들였을 개연성도 있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은 석실의 터널식 천장 구조가 공주 송산리 벽화전분과 유사하고, 그 천장에 그려져 있는 연꽃무늬는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한 양식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다.
서기전 3세기경에 중국 동북 지역과 청천강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는 전국시대 연(燕)나라 계통의 철기 문화가 퍼져 있었으며, 청천강 이남의 대동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는 세형동검 계통의 청동기 문화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전반에 위만조선의 성립과 함께 전국계(戰國系) 철기 문화가 대동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들어와 기존의 청동기 문화와 융합되었다.
서기전 2세기 말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이민이 남하함에 따라, 서기전 1세기 이후 경상남도 창원과 경상북도 경주 지방에서 위만조선계의 청동기 · 철기 복합문화가 나타났다. 서기 이후 이 문화는 순수 철기 문화로 진전되었으며, 늦어도 2세기 전반에는 창원 지방에서 철기 제작뿐만 아니라 철 생산이 개시되었다.
2세기 후반 이후 가야의 철 생산 주류가 창원에서 김해로 이동되면서 한(漢)나라의 새로운 기술이 유입되어 철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단조 철기가 증가되었다. 이후로 김해 가야국은 한반도 각지 및 일본 열도에 철을 수출하면서 세력을 성장시켜 나갔다.
낙동강 하류에 있는 김해와 부산 지방에서는 2세기 후반~4세기 중엽까지 납작도끼형 덩이쇠를 철 소재로 생산하여 유통시켰으며, 4세기 후반 이후로는 본격적인 덩이쇠를 생산하였다.
5~6세기에는 제철 기술이 가야 각지로 분산되어 김해 · 부산뿐만 아니라 함안 · 합천 · 창원 등지에서도 제철의 증거라고 보이는 덩이쇠와 미늘쇠를 생산하였다. 가야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 열도는 5세기 말엽부터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의 철기에는 농기구, 무기, 갑주, 마구 등이 있다. 철제 농기구로는 서기전 1세기에 끌, 쇠망치, 쇠손칼, 따비, 낫, 쇠도끼 등이 나타났고, 4세기 이후로는 쇠스랑, 쇠삽날, 가래, 살포 등의 농기구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5~6세기에는 실용 농기구가 무덤에 부장되지 않게 되고 대신 대가야 세력권을 중심으로 축소 모형 철제 농기구가 부장되었으니, 이는 가야에 특정한 농경의례가 생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제 무기로는 서기전 1세기에 쇠단검, 쇠투겁창, 쇠꺽창 등이 나타났고, 서기 2세기 후반 이후로는 새로이 쇠장검, 고리자루 큰칼, 슴베 있는 쇠화살촉 등이 추가되었다.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좀 더 관통력이 향상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목 있는 쇠화살촉이 나타나서 무기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5~6세기에는 목 긴 화살촉이 새로이 나타나고, 철제 무기에 장식적인 요소가 나타나서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큰칼이나 화살통 등이 유행하였다.
가야의 철제 갑주는 4세기에 종장판 혁철 투구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을 위주로 발전하였다. 5세기에는 미늘갑옷이 나타나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종장판 정결 판갑옷은 5세기 중엽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5세기 후반에는 삼각판 판갑옷, 횡장판 정결 판갑옷, 챙 달린 투구, 충각부 투구 등이 소형 고분 위주로 나타났다. 5~6세기의 가야 지역에는 말투구와 말갑옷도 성행하였다.
가야의 마구는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 무렵까지 S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철제 재갈이 나타나 마차용으로 쓰였다고 여겨지나, 4세기에는 기승용 마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세기의 마구에는 F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원형 판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목심철판 발걸이, 심엽형 말띠드리개 등이 나타났다.
5세기에는 마구에 장식적인 요소가 채택되어 금은으로 꾸민 내만타원형 판상 재갈멈추개, F자형 판상 재갈멈추개, 검릉형 말띠드리개를 위주로 분포되었고, 이는 일본 열도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가야는 한동안 잃어버린 역사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그 이전의 고대사는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였다는 인식으로 정리되었고, 삼한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동일시되었다. 이를 정리한 책이 『삼국사기』였고, 거기에서 가야는 신라 주변에 있는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에 한백겸이 엮은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의 마한 · 진한 · 변한은 곧 백제 · 신라 · 가야로 전환되었다고 수정하면서 가야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안정복이나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6가야의 지명을 비정한다거나, 가야의 해운 능력을 재조명하는 식으로 가야사 연구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일본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가야 지역은 일본 고대 진구(神功) 황후 이래 수백 년 동안 일본의 통치를 받은 임나였다는 『일본서기』의 관념이 제기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야사는 다시 잠복되고 일본에 의한 임나일본부설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다.
1950년대 이후로 일본에서는 고고학 연구 수준이 발달하여 일본의 4~5세기 고대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에 의하여 갑자기 발전하였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이 나타났으나, 전통적인 임나일본부설의 견제를 받아 연구가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일본의 문헌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된 『일본서기』의 기록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는 연구들이 제기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이 활성화되고 그 성과가 축적되어 옛 가야 문화권에서 출토되는 방대한 유물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고고학계에서는 경주평야 일대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을 제외한 경상도 전역의 움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 유적이 모두 가야의 것이라는 과도한 해석이 한동안 유행하였다.
문헌사학계에서는 가야가 일본의 통치를 장기간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통치를 받은 것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는 고고학 및 문헌사학의 연구 수준이 높아지고 차분한 연구 성과들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왜나 백제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였고 낙동강 동쪽의 유물들은 5세기 이후로 신라의 것이지 가야의 것이 아니라는 연구가 나타나서, 고고학과 문헌사학을 접목하여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나타나 논쟁을 거듭하는 중에, 가야는 단순한 소국연맹체가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을 점유한 지역연맹체였다거나 혹은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시켰다는 연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는, 가야가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적어도 4백년 이상 7백년 이하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신라의 발전 과정 아래 통합된 여러 소국 중의 하나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