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지덧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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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일원 중 황남리 고분군의 황남대총 서면
경주 대릉원 일원 중 황남리 고분군의 황남대총 서면
선사문화
개념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덧널을 짜 놓고 그 위에 돌무지와 봉토를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양식. 적석목곽분 · 목곽적석총 · 적석봉토분.
이칭
이칭
적석목곽분, 목곽적석총, 적석봉토분
정의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덧널을 짜 놓고 그 위에 돌무지와 봉토를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양식. 적석목곽분 · 목곽적석총 · 적석봉토분.
개설

나무덧널〔積石〕위로 냇돌로 돌무지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유실되지 않도록 한 다음, 판축하여 거대한 봉분을 올린 무덤 양식이다.

일반적으로 목곽적석총(木槨積石塚)·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 등으로 불린다. 지상 또는 지하에 피장자(被葬者)와 껴묻거리〔副葬品〕를 안치한 덧널을 구덩식〔竪穴式〕으로 설치한 다음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로 덧널을 덮어 돌무지시설을 하고, 다시 그 바깥에 점토 등의 흙을 입혀 다지는 방법을 사용한다.

내용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원칙적으로 지하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상자형 덧널을 짠 다음 냇돌로 둥글게 쌓고 다시 봉토를 덮은 것으로 으뜸덧널 발쪽에 조금 떨어져 유물을 넣기 위한 딸린덧널을 두는 것이 오랜 식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옛 신라 지배집단의 매장시설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대체로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경주시 교동·인왕동·황오동·황남동·노동동·노서동 등지에 조영되어 있는 대규모의 고분군과 경주 금척리고분군에서처럼 평지에 조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경주 보문동고분군 중 2기, 경주 안계리고분군, 의성군 탑리·대리고분군, 창녕·삼척·부산 동래 등지의 고분군에서 발굴조사된 사례처럼 구릉지대에 조영된 것도 있다.

1921년 금관총(金冠塚)이 처음 발굴되었고 이어서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식리총(飾履塚)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6세기 전반대에 축조된 왕릉급 무덤으로서 화려한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광복 이후 천마총(天馬冢: 황남동155호분), 황남대총과 같은 왕릉급 무덤이 발굴되어 돌무지덧널무덤의 입체적 구조가 상세히 밝혀졌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의 덧널형식과 무덤의 형태로 나누어 분석된다. 무덤의 덧널형식이란 덧널 내부구조의 형식을 의미하고 무덤의 형태는 하나의 묘역 안에 덧널을 배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고분들의 구조는 모두 매장주체시설이 구덩식덧널로 되어 있고 돌무지시설과 봉토가 있다거나 둘레돌〔護石〕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분마다 조영방식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지면을 기준으로 한 덧널의 위치에 따라 지상식·반지하식·지하식으로 구분된다. 덧널에 따라서는 돌무지 안의 덧널의 유무에 따라 돌무지덧널식, 단순돌무지식으로 구분된다.

돌무지덧널식 중에서도 덧널이 1개인 것은 외덧널식〔單槨式〕·독곽식(獨槨式)·바깥덧널식〔外槨式〕, 2개인 것은 겹덧널식〔複槨式〕·양곽식(兩槨式)·쌍곽식(雙槨式), 3개 이상인 것은 여러덧널식〔多槨式〕이라 한다. 외덧널식은 물론 겹덧널식이나 여러덧널식에 있어서도 고분의 구조상 돌방무덤에서와 같은 합장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자연히 홑무덤〔單葬〕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덧널식의 경우에는 그 만큼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이 늘어나는 셈이 된다.

미추왕릉으로 전하는 황오동 106호분 부근에 밀집돼 있는 단순돌무지식은 대개 규모가 작고 여러 덧널이 서로 접해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두 지하에 협소하게 축조되었기 때문에 구조상으로도 덧널을 설치하기 힘든 정도이다. 이러한 형식은 경주고분 지대의 중심지에서 볼 때, 대체로 동쪽에 몰려 있는 편이다.

돌무지에 있어서는 보통 냇돌을 사용한다. 평면적으로는 장방형, 입체적으로는 윗부분이 납작한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 원칙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덧널이 썩어 내려앉기 때문에 돌무지도 덧널 윗부분에 무너져 내려 돌무지 전체모양이 마치 낙타등처럼 된다. 돌무지 바깥으로는 점토를 두껍게 발라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돌무지봉토분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구별되는 것은 봉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봉토는 거의가 원형이다. 돌무지시설이 상당히 큰 규모이고 그것을 둘러싼 봉토도 대규모여서 신라의 고분이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고분에 비해 상당히 대형화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원형의 홑무덤〔單墳〕이 기본이지만, 합장하려는 의도에 따라 2개 이상의 원분을 연결해놓은 형태인 표형분(瓢形墳)·쌍원분(雙圓墳)도 상당수 있다.

이밖에 고분에 따라서는 둘레돌을 설치한 것도 있다. 재료로는 주로 냇돌을 이용했지만 간혹 막돌을 쓰기도 하였다. 둘레돌은 봉토를 보호하는 기능 외에도 묘역의 표시 내지 경계로 사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돌무지봉토분에 대해서는 구조상의 계통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먼저, 전통적인 움무덤과 덧널무덤이 압록강유역에서 성행했다가, 다음으로 서울 석촌동·대구 구암동을 거쳐 경주지역으로 들어온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변모하였고, 여기에 다시 한강유역에서 조영되던 원형봉토분이 남하함으로써 돌무지 위에 봉토를 입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이 경주지역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미추왕릉(283년)을 처음으로 ‘대릉(大陵)’이라 부르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김씨왕들에 의한 경주평야에서의 특별히 큰 고총 축조가 적어도 3세기 말에는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돌무지봉토분은 이상과 같은 복잡하고도 특이한 구조 때문에 도굴이 용이하지 않아 다른 종류의 고분들에 비해 껴묻거리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금관총을 비롯해 경주분지 내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돌무지봉토분에서 순금제 금관이나 각종 귀금속 장신구 등 풍부한 양의 껴묻거리가 출토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구조 때문이다.

종래의 학자들은 돌무지봉토분이 덧널·돌무지·봉토·둘레돌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조적 특징을 들어 흔히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묘제 연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덧널이 경주 황오동고분군 중에는 없는 것이 많은 점을 감안한다면, 돌무지봉토분이라는 명칭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초부터 6세기 전반대까지 경주시내 평지에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4세기대 이전의 무덤이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무덤의 구조 자체만 보면 알타이지방의 파지리크에서 발굴된 돌무지덧널무덤과 유사하여 신라의 지배집단은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주민이라고 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었다. 근래에는 울산과 포항 등 경주 주변지역에서 5세기대 이전에 속하는 덧널무덤들이 많이 조사되면서 이들을 검토해 2세기 중·후엽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덧널무덤이 연속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의 형태가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나왔다. 즉, 초기형 덧널무덤이 3세기 후반에 으뜸·딸린덧널식으로 발전하고 3세기 말경부터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공간을 돌로 채우다 덧널 위로도 돌을 쌓게 되면서 돌무지 봉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3세기 말경에 나타난 최초의 원시적인 봉분과 둘레돌이 발전하여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완성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이 되었다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돌무지덧널무덤의 기원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이 무덤 양식이 신라 중고기 대표적인 묘제로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시기에 유행하였으며 그 거대한 규모와 풍부한 껴묻거리 등은 이 묘제의 독특한 특성으로서 지목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신라고분연구』(최병현, 일지사, 1992)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 일지사, 1973)
「중국동북지방의 고분」(강인구,『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한국묘제의 변천」(윤무병,『충남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2-5,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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