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유신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의 장수 김유신의 무덤이다. 이 무덤의 봉분은 지름 30미터에 이르며 주위에 둘레돌을 배치하였다. 버팀돌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갑옷을 입은 다른 왕릉과 달리 모두 평복에 무기를 들고 오른쪽을 보고 있다. 묘역에서도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인 토끼상과 말상이 발견되었는데, 십이지신상을 무덤 주위에 따로 묻어 버팀돌과 함께 이중배치한 점이 주목된다.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높여 부르면서 둘레돌과 십이지신상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신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김유신의 묘는 송화산(松花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의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유신묘는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의 큰 무덤이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바닥에 깐돌[敷石]을 깔았으며, 돌난간[石欄干]을 둘렀다. 둘레돌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둘레돌과 같은 양식으로서 벽석(壁石) · 연헌석(緣軒石), 연대석(緣臺石)으로 짜여 있다.
둘레에는 95㎝ 높이의 탱주석(撐柱石)을 세웠는데 소면석(素面石)과 신상석(神像石)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신상석은 모두 12개로 자상(子像: 쥐) · 축상(丑像: 소) · 인상(寅像: 호랑이) · 묘상(卯像: 토끼) · 진상(辰像: 용) · 사상(巳像: 뱀) · 오상(午像: 말) · 미상(未像: 양) · 신상(申像: 원숭이) · 유상(酉像: 닭) · 술상(戌像: 개) · 해상(亥像: 돼지) 등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몸[身部]은 ‘을(乙)’자형으로 틀었다. 새김은 대체로 엷게 새긴 느낌을 주나 그 수법은 세련되고 능숙하다.
능묘의 둘레돌은 옛 신라시대부터 비롯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봉분표식 방법으로 전환하여 둘레돌 장치와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등 묘요(墓腰)를 정비하였다.
이 묘의 봉분표식 구조와 양식은 흥덕왕릉의 봉분표식과 비슷해 김유신이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 묘역에서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인 묘상과 오상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가 30㎝인 소상(小像)들이고 갑주무장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또한 봉분표식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의장과 묘역매설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의장이 중복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동향(東向)한 산봉에 있다”고 하였으니 곧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묘를 일컫는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 1천필과 조(租) 2천석을 증부(贈賻)하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禮葬)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에는 이 묘 아래에 수묘(守墓)의 금산재(金山齋)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태대각’이라 새긴 신라비편(新羅碑片)이 경주 교동에서 발견되어 김유신의 기공비편(紀功碑片)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 비편에 의해 김유신이 죽자 당시 문무왕이 왕명으로 예를 갖추어 후대한 예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아울러 기공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석비는 1710년(조선 숙종 36)에 경주부윤(慶州府尹) 남지훈(南至熏)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문인석, 무인석, 석상(石床) 등은 모두 수년 전 보수할 때 첨가된 후보물(後補物)들이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 이 무덤은 김유신묘가 아니고 신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