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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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5대(재위:839) 왕.
이칭
이칭
우징(祐徵), 김우징(金祐徵)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839년(신무왕 1)
본관
경주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신라 제45대 국왕(재위: 839년 4월∼7월)
관련 사건
김헌창(金憲昌)의 난
내용 요약

신무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39년 중 반 년이 안될 정도로 짧다. 신무왕 재위기는 원성왕 자손들 간에 치열한 왕위계승분쟁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아버지 김균정을 왕에 옹립하려던 싸움에서 패하고 청해진의 장보고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민애왕 토벌에 나섰다. 민애왕은 김균정을 살해하고 세운 희강왕을 다시 반란으로 자진케 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민애왕이 전투 중 도망가다가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장보고의 압력을 받다가 몇 달 만에 병사했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5대(재위:839) 왕.
개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할아버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追封)된 원성왕(元聖王)의 아들 예영(禮英),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橋夫人) 박씨이다.

생애 / 활동사항

우징이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해 부상한 시기는 헌덕왕(憲德王) 때였다. 812년(헌덕왕 4)에 균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822년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828년(흥덕왕 3)에 우징은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834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上大等)에 피임된 뒤 우징은 시중직을 사퇴해 김명(金明: 민애왕)이 대신 시중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균정과 김명 간의 대립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뒤에 사촌 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 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이 때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들게 되면서 한때 궁궐에서 암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쳐 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서 이긴 제륭은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희강왕 3)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김명 역시 그 뒤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민애왕 1)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민애왕(閔哀王)을 토벌하기 위해 진격해 왔다. 김양 · 염장(閻長) · 장변(張弁) · 정년(鄭年) · 낙금(駱金) · 장건영(張建榮) ·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 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에 파견해 토벌군과 싸우게 했으나 패배했다. 다음해 정월에는 달벌(達伐: 지금의 대구)에서 왕군(王軍)과 토벌군이 접전하게 되었다. 이 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대흔(大昕) · 윤린(允璘) 등 역시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싸움 와중에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우징이 신무왕(神武王)으로 등극하였다.

애장왕 이후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5대 30년간에 이처럼 독립된 가계의 원성왕 자손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있었다. 이 시기의 왕위계승분쟁은 제륭(희강왕)-김명(민애왕)의 제휴세력과 김균정-김우징(신무왕) 부자 사이의 대립이었는데, 이는 원성왕의 아들 중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의 다툼이자 좁게는 원성왕의 손자인 충공(忠恭), 헌정(憲貞), 균정 가계 사이의 분쟁이었다. 원성왕대는 하대의 권력구조를 특징지우는 왕실친족 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 권력 집중이 확정되어 가던 시기로,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하여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兵部令), 재상(宰相),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 시중 등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원성왕 사후 원성왕 자손들 간의 격심한 왕위계승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 속에서 균정계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 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다.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됨에도 불구하고, 신무왕은 장보고를 공신으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고, 김식(金式), 대흔(大昕) 등 민애왕의 측근들을 사면해야 했다. 이후 문성왕(文聖王) 11년(849) 9월에 이르러 김식과 대흔이 급기야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김식과 대흔은 문성왕대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종전의 민애왕측 귀족들의 잔여세력과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은 신무왕-문성왕의 왕권을 반대하고, 인겸계의 왕위계승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신무왕∼문성왕은 이처럼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폭넓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무왕은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000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것은 청해진세력의 강대함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해야 하는 과업을 남긴 채 돌아갔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하대(新羅下代) 왕위계승분쟁과 민애왕」(권영오, 『한국고대사연구』19, 2000)
「신무왕(神武王)의 등극(登極)과 김흔(金昕)」(문경현, 『서암조항래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
「신라하대(新羅下代)의 왕위계승(王位繼承)과 정치과정(政治過程)」(이기동, 『역사학보』85,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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