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8대 왕.
이칭
성명
김경신(金敬信), 김경신(金敬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798년(원성왕 14)
주요 관직
통일신라 제38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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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8대 왕이다. 재위는 785∼798년이다.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으로, 이름은 김경신(金敬信 혹은 金敬愼)이다. 혜공왕(惠恭王) 대 김양상(金良相, 훗날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선덕왕(宣德王)의 즉위에 기여하며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김주원과의 왕위계승 다툼이 있었으나 왕으로 즉위하였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고, 발해와의 외교를 펼쳤으며 봉은사(奉恩寺)를 완성하는 등 하대 왕실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8대 왕.
가계 및 인적 사항

원성왕(元聖王)은 통일신라 제38대(재위: 785798) 왕이다.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12세손으로, 이름은 김경신(金敬信 혹은 金敬愼)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으로 후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봉되었고,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 혹은 知烏夫人)으로 소문왕후(昭文王后)로 추봉되었다. 왕비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金氏)는 신술(神述) 각간(角干)의 딸이다.

활동 사항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대 김양상(金良相, 훗날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즉위에 기여하며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당시 왕의 족자(族子)로 표현된 친족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은 집이 서울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자 원성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김주원이 상재(上宰)로, 김경신이 이재(二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김주원의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앞서의 내용을 통해 두 인물 간 왕위 다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관련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보인다.

원성왕 원년(785) 3월에 신라 9주의 장관인 총관(摠管)의 명칭을 도독(都督)이라 변경하였다.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였다. 이는 경전의 이해 정도에 따라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등급을 나누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이전에는 궁술(弓術)로 관리를 선발하였는데, 원성왕은 국학(國學) 기능을 강화하려는 등의 목적에서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였다.

원성왕 6년(790)에는 일길찬(一吉湌) 백어(伯魚)를 북국(北國), 즉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신라가 발해를 ‘말갈’이나 ‘오랑캐’, ‘흉적’ 등으로 부르던 이전과 달리 원성왕 대에 ‘북국’으로 칭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발해를 외교적 대상 국가로 인식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때 발해는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로, 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중앙 정치기구와 지방통치제도 등을 정비하면서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원성왕은 변화된 발해의 위상을 인정하는 외교책을 취하였으며, 동시에 신라 내의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원성왕 10년(794) 7월에는 봉은사(奉恩寺)가 창건되었다. 봉은사는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과 「숭복사비(崇福寺碑)」에 따르면 혜공왕 대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원성왕 대에 이르러 완성된 봉은사는 왕실 사원으로서의 사격(寺格)을 유지하였다.

불교에 대한 원성왕의 태도는 즉위 원년(785)에 시행한 정법전(政法典)의 정비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법전은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승관(僧官)을 두고 승려 중에 재행(才行)있는 자를 선택하여 충당하였다. 승관으로는 주로 대덕(大德)의 직을 가진 승려를 둠으로써 계율에 따른 바른 승정(僧政)을 실시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승관을 통해 불교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황룡사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들여 『 화엄경(華嚴經)』의 독경(讀經)을 청한 점에서 원성왕의 화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한편, 원성왕 대에는 재해의 발생 빈도가 높았다. 한재(旱災) · 지진(地震) · 황해(蝗害) · 상해(霜害) · 박해(雹害) · 대풍(大風) · 대수(大水) 등이 있었는데, 이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원성왕 4년(788) 도적 발생과 원성왕 7년(791) 제공(悌恭)의 모반 역시 이를 배경으로 한다.

원성왕은 재위 14년(798)에 죽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명(遺命)에 의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화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왕의 능이 토함산 서쪽 마을의 곡사(鵠寺), 즉 숭복사(崇福寺)에 있다고 하여 지금의 괘릉(掛陵)이 원성왕릉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주의 지지(地誌)인 『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전설에 따르면 원성왕을 수중에 장사지내고 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흙을 쌓아 능을 만든 까닭에 괘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 대는 실질적으로 신라 하대(下代)가 시작된 시기로 평가된다. 신라 중대(中代) 무열왕계(武烈王系) 세력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만큼 왕권을 공고히 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오묘(五廟)에 포함시키고 진지왕의 추복 사찰인 봉은사를 완성하였으며, 만파식적설화(萬波息笛說話)를 부각하는 등 무열왕계를 극복 및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하대 왕실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김창겸,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온샘, 2018)
곽승훈, 『통일신라시대의 정치변동과 불교』(국학자료원, 2002)

논문

신선혜, 「원성왕대 政法典의 개편과 正法治國 이념」(『신라사학보』 43, 신라사학회, 2018)
윤선태, 「『삼국유사』 기이편 ‘원성대왕’조의 가치」(『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38,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7)
이기봉, 「신라 원성왕대의 재이와 정치, 사회적 변동」(『신라사학보』 25, 신라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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