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척명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원광, 비허 등의 불교 사적을 정리한 문인이다. 김척명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향인(鄕人)'으로 지칭하였는데, 중국인과 대비된 신라인 혹은 관직이 없는 일반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에서는 원광(圓光)과 보양(寶壤)에 대한 사적이 실린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을 그가 개작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보양이목」조에서는 견성(犬城)에 대한 내용이 비허(備虛)의 전기에 들어있는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으므로, 김척명은 비허의 전기도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척명의 가계나 활동 양상은 사료에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그를 “향인(鄕人)”으로 지칭하였는데, 중국인과 대비된 신라인 혹은 관직이 없는 일반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의 찬자는 원광(圓光)과 보양(寶壤)에 대한 사적이 실린 고본 『 수이전(殊異傳)』을 그가 개작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즉 「원광서학(圓光西學)」조와 「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서 김척명이 원광과 보양의 사적을 하나로 합하였고, 이후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 이를 그대로 계승한 점을 비판하였다.
김척명이 원광의 전기만 개작하였는지 혹은 『수이전』 전체를 개작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아울러 그가 『수이전』을 찬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수이전』이 일문(逸文)으로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찬자가 『해동고승전』에서는 박인량(朴寅亮),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최치원(崔致遠)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찬자가 『해동고승전』을 참고하였으므로 박인량의 『수이전』 기록을 보았음에도 김척명만을 개작자로 서술한 점을 통해 『삼국유사』 찬술 당시 김척명과 박인량의 『수이전』과 함께 이와는 구별된 고본이 각각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척명이 운문사(雲門寺)의 창건자를 원광으로 내세운 것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두 조목에 걸쳐 비판한 것은 선종 승려였던 일연(一然)이 운문사에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계 승려였던 보양의 사적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보양이목」조에서는 고려 태조가 청도(淸道)의 견성(犬城)을 공략할 때 보양이 도운 사실을 말하며, 이러한 사실이 비허(備虛)의 전기에 들어있는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김척명은 원광과 함께 비허의 전기도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