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圓光)의 성은 박(朴)씨나 설(薛)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 550년(진흥왕 11)경에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광은 진흥왕 36년(575)경 25세의 나이에 진(陳)의 금릉(金陵)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금릉에서 승민(僧旻)의 제자에게 강론을 듣고 불교에 귀의(歸依)하였다. 진(陳)나라와 수(隋)나라에서 유학하고 600년(진평왕22)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원광 이후 중국으로 유학가는 이들이 줄을 지었다. 귀국 후 원광은 가슬갑사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귀산과 추항에게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당시 귀산과 추항은 낭도(郎徒)의 신분이었다고 보고 있어 원광이 내린 세속오계를 화랑도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지방민을 대상으로 점찰법회(占察法會)을 열었다. 점찰법회란 나무패를 이용하여 개인의 전생 숙업(宿業)을 알아봄으로써 현재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고 그 결과에 따라 참회를 행하는 의식이다. 점찰법회를 통해 원광은 개개인에게 현재와 내세의 안락을 기원해 주고, 이미 죽은 자들을 추선하여 내세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해 주었다.
608년(진평왕 30) 진평왕은 원광에게 수나라에 군대를 청하는 표문을 짓게 하였다. 원광은 공식 외교 문서를 도맡아서 작성하였다. 613년(진평왕 35)에 수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개최되었는데, 원광은 이 법회에 상수(上首)로 참여하였다. 원광은 노년에 수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하였고, 진평왕은 원광에게 손수 옷, 약, 음식을 모두 마련해 줄 정도로 그를 존중하였다.
원광은 진에서 유학하면서 『성실론』, 『열반경』을 터득하였고, 수론(數論) 등을 두루 찾아 읽었다. 또한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수행에 매진하였다. 589년(진평왕 11)에는 수의 장안으로 가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공부하였고, 그에 대한 명확한 해석으로 장안의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목록집에는 원광이 『대방등여래장경』, 『여래□경기』를 저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