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

불교
인물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화랑도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고 걸사표 등의 외교 문서를 작성한 고승.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550년(진흥왕 11) 추정
사망 연도
미상
주요 저서
대방등여래장경, 여래장경사기, 여래□경기
내용 요약

원광(圓光)은 575년경 진에 유학을 가서 출가하고 수의 장안에서 수학한 후 600년(진평왕22)에 귀국한 신라의 고승이다. 교학에 밝았던 그는 귀국 후 『성실론』, 『섭대승론』 등을 강의하였으며, 가슬갑사에 머물며 점찰법회를 주관하였다. 가르침을 구하러 온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주기도 하였다. 진평왕의 요청으로 걸사표 등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고, 국왕이 주최한 백고좌법회 때 상수의 역할을 맡았다.

정의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화랑도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고 걸사표 등의 외교 문서를 작성한 고승.
개설

원광(圓光)의 성은 박(朴)씨나 설(薛)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 550년(진흥왕 11)경에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활동

원광은 진흥왕 36년(575)경 25세의 나이에 진(陳)의 금릉(金陵)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금릉에서 승민(僧旻)의 제자에게 강론을 듣고 불교에 귀의(歸依)하였다. 진(陳)나라와 수(隋)나라에서 유학하고 600년(진평왕22)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원광 이후 중국으로 유학가는 이들이 줄을 지었다. 귀국 후 원광은 가슬갑사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귀산추항에게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당시 귀산과 추항은 낭도(郎徒)의 신분이었다고 보고 있어 원광이 내린 세속오계를 화랑도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지방민을 대상으로 점찰법회(占察法會)을 열었다. 점찰법회란 나무패를 이용하여 개인의 전생 숙업(宿業)을 알아봄으로써 현재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고 그 결과에 따라 참회를 행하는 의식이다. 점찰법회를 통해 원광은 개개인에게 현재와 내세의 안락을 기원해 주고, 이미 죽은 자들을 추선하여 내세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해 주었다.

608년(진평왕 30) 진평왕은 원광에게 수나라에 군대를 청하는 표문을 짓게 하였다. 원광은 공식 외교 문서를 도맡아서 작성하였다. 613년(진평왕 35)에 수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개최되었는데, 원광은 이 법회에 상수(上首)로 참여하였다. 원광은 노년에 수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하였고, 진평왕은 원광에게 손수 옷, 약, 음식을 모두 마련해 줄 정도로 그를 존중하였다.

학문과 저술

원광은 진에서 유학하면서 『성실론』, 『열반경』을 터득하였고, 수론(數論) 등을 두루 찾아 읽었다. 또한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수행에 매진하였다. 589년(진평왕 11)에는 수의 장안으로 가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공부하였고, 그에 대한 명확한 해석으로 장안의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목록집에는 원광이 『대방등여래장경』, 『여래□경기』를 저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원광은 매년 두 번씩 강의하며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로 원안(圓安)이 있다. 훗날 그의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세워졌는데, 후속이 끊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원광의 무덤 옆에 아이의 태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속고승전(續高僧傳)』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논문

곽승훈, 「『해동고승전』 원광전의 찬술과 사학사」(『한국사학사학보』 31, 2015)
박광연, 「원광의 점찰법회 시행과 그 의미」(『역사와 현실』 43, 2002)
최연식, 「원광의 생애와 사상-『삼국유사』 「원광전」의 분석을 중심으로-」(『태동고전연구』 12,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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