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

경주 황룡사지 중 강당터
경주 황룡사지 중 강당터
불교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 제24대 왕 진흥왕 때 창건한 절.
유적/건물
건립 시기
569년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경주 황룡사지(慶州 皇龍寺址)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황룡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 제24대 왕 진흥왕 때 창건한 절이다.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로 고쳐 황룡사라 하였다. 건립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7처 가람지 중 하나였다. 절터는 1963년에 ‘경주 황룡사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지정되었으며, 관련 문화유산으로 2015년에 보물로 지정된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가 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 제24대 왕 진흥왕 때 창건한 절.
원건물 건립 경위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고 있었는데, 그곳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대궐을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였으며, 건립 17년 만인 569년(진흥왕 30)에 완성하였다.

변천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 터로 보았다.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또, 역대 왕들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講)하는 주1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9층 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자장(慈藏)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 또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며 일을 주관하였는데, 탑의 총 높이가 주2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립(粒)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 중화(中華) · 오월(吳越) · 탁라(托羅) · 응유(鷹遊) · 말갈 · 단국(丹國) · 여적(女狄) · 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탑이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 벼락에 맞아 불탄 이후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다. 9층 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 자료인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는 2015년 4월 22일에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238년(고종 25) 몽골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 없어졌을 때 목탑도 전소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형태와 특징

절터의 전역은 약 8만 2500㎡이다. 유지(遺址)는 보존 상태가 좋아 중문과 탑, 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 대부분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 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렸다. 주3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 존상(丈六 尊像)과 9층 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 벽화도 있었다.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설하였고, 원효(元曉: 617~686)『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하였던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목탑의 각 초석 지름은 약 1m 내외이다. 사방에 8개씩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 갔으나, 이후 도굴단을 잡아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주4의 석가여래 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과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설화가 전하는데,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함께 실어 보냈다고 한다. 이 금과 철을 경주로 실어 와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 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황룡사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5]보다 4배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골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주6는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의의 및 평가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황룡사는 7처 가람지(七處 주7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 면에 있어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황룡사 복원정비사업 발굴조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9)
주석
주1

사자좌 백 개를 만들어 고승 백 명을 모시고 설법하는 큰 법회. 신라 진흥왕 12년에 고구려에서 온 고승 혜량(惠亮) 법사가 처음으로 신라에 설치하였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우리말샘

주2

약 68.18m. 1척은 약 30.3㎝.

주3

신라 때의 세 가지 보물. 황룡사의 장륙 존상(丈六尊像), 황룡사 구층탑(九層塔), 진평왕의 옥대(玉帶)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4

높이가 일 장(丈) 육 척(尺)이 되는 불상. 우리말샘

주5

신라 경덕왕에서 혜공왕 7년(771)에 걸쳐 만들어진 종. 어느 승려의 권고로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가마솥의 쇳물에 넣고 나서 제작에 성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우리말샘

주6

경주 황룡사지(慶州 皇龍寺址).

주7

과거 7불이 주석하였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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