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국찰(國刹) 황룡사에서 주조하였던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이 불상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 황룡사 금당지(金堂址)에 남아 있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573년(진흥왕 34년) 10월 17일에 조성하기 시작해서 그 이듬해인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쇼카왕[阿育王]이 보낸 황금과 동으로 모형 석가삼존상을 본보기로 삼아 문잉림(文仍林)에서 장륙존상을 단번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장륙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인데 황금이 1만 198분(分)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할 만큼 거구의 금동삼존불상으로 생각된다. 장륙상의 높이는 1장6척이므로 4.5∼5m 사이의 우람한 상이 될 것이다.
명칭은 『삼국유사』에 보이듯이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는 문수(文殊)·보현(普賢) 보살로 생각된다.
이 불상의 양식은 거의 알 수 없지만 일단 전(傳)황룡사금동불입상과 비슷한 양식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양식은 중국의 북위말 내지 동위·서위 양식과 비견되는 것으로 고구려의 경4년명금동불입상과도 친연성이 짙은 것이다.
이러한 양식에 북제(北齊)·북주(北周)의 특징을 가미한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면 전황룡사금동불입상보다는 다소 진전된 양식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쇼카왕이 석가삼존상 모형을 보냈다는 전설을 고려한다면 인도의 굽타 양식 불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인도적인 특징을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6세기 후반기에 새로 유입된 굽타 양식 불상의 영향을 농후하게 받아 제작되는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도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좌는 장륙존상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다.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을 파고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킬 수 있는 꼭지의 홈도 팠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이다. 이러한 모양은 좌우 협시대좌도 거의 비슷한 편이다.
이 대좌를 보아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1척 가량이나 적셨다.”고 한 전설을 이해할 수 있다.
‘신라가 곧 불국토(佛國土)’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이 장륙존상은 현재 대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원모습을 알 수 없지만 신라 삼대 국보의 하나로서 우람한 위용의 최대 걸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