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은 부지를 양분하는 경계선을 따라 축조된 서북-동남 방향의 축대를 기준으로 서남쪽의 상층부와 동북쪽의 하층부로 대별된다. 상층부와 하층부는 지반의 고저차, 토층 상태 등을 비롯하여 유구의 성격도 다르지만, 모두 동일 경역에 속해 있다. 상층부의 현재지표는 하층부에 비해 50㎝ 이상 높게 형성되어 있지만, 신라시대의 구지표에 비해서는 상당 부분 삭평 또는 결실된 상태이다. 하층부는 연못을 중심으로 형성된 원지 영역과 그 북쪽의 건물지 영역 등으로 크게 나뉘며, 연못 동쪽에도 별도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원지 유적은 조사 결과 상·하로 중복된 연못 호안 석축, 입수로, 배수로, 담장, 출입시설, 부속건물지, 우물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원지 유적에서 확인된 연못은 크기가 남북 46.3m, 동서 26.1m, 하안 석축 길이 192m, 면적 1,049㎡이며 안압지의 약 1/15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내부에는 용강동 원지와 마찬가지로 2개의 인공섬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남쪽의 작은섬은 크기가 둘레 43m, 면적 118㎡(36평)이며, 연못 바닥을 굴광한 다음 말각방형에 가깝게 성토하여 조성하였다. 북쪽의 큰섬은 둘레 70m, 면적 301㎡(91평)으로 하상퇴적층 원지반을 그대로 두고 가장자리만 굴착하여 능형으로 조성하였다. 큰섬 주변의 상층 바닥은 작은섬 하층 바닥에 비해 60㎝ 가량 높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구지표로부터 측정한 연못의 최대 깊이는 1.6m에 달한다. 바닥에는 3~5군데에서 지하수가 용출되고 있어 일정 수위까지는 용출수에 의해 수량이 유지되었다. 연못의 입수구는 연못 동쪽 담장의 남쪽 부분에서 서쪽으로 직진하다가 직각으로 꺾이는 형태이다.
호안석축은 1·2차 축대가 상하 중복되었으며, 1차 축대는 지반을 따라 직선과 꺾임을 반복하면서 천석으로 허튼층 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축대 앞쪽에는 사력층을 부설한 위에 회갈색 점토층을 피복하여 지표를 형성하였다. 2차 축대는 1차 축대가 폐기된 이후 대형의 할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원지 유적의 동쪽 경계선을 따라서는 천석을 사용한 별도의 수방용 축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못 내부에서는 동시에 함몰된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초석·와당·기초용 잡석 등 각종 건물부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축대 상층부에는 누정형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원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편년을 검토해 보면, 와당류는 수막새와 암막새가 분황사 금당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일한 거푸집에서 찍은 것으로 판명된 유물들로 판단할 때, 8세기가 중심연대로 생각된다. 또한 토기류는 7세기후반에서 8세기대에 사용된 인화문토기류가 주류를 이루나 7세기 초반의 토기도 하층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원지의 존속 기간이 상당히 길었음을 시사해 준다.
원지 유적은 선덕여왕 3년(634)에 분황사가 창건된 이후에 분황사의 동쪽에 동지(東池)가 조성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동지로 판단할 수 있으며, 이때 1차축대가 축조되었다가 효소왕 7년(698)이후에 북천이 범람하여 폐기된 후 경덕왕 14년(755)에 분황사의 약사동불을 주조할 때, 폐허가 된 동지를 다시 조성한 것이 2차축대로 생각된다. 이후 김극기의『분황사 연소』에는 고려 명종대 폐기된 동지를 묘사하였으므로 적어도 12세기 이전에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