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역대 왕들이 다투어서 건립하고 각종 도량(道場)을 열었으며, 충숙왕은 1313년에 이곳으로 행차하여 계송(戒松)에게 시를 짓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 초기까지 내원당은 개성의 옛 궁궐 안에 있었다. 태조는 1393년(태조 2)에 행차하여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포상하였다. 1409년에 태종은 개성에 있던 내원당을 서울 창덕궁 안의 문소전(文昭殿) 옆으로 옮겨 창건하였다. 1439년에 세종은 불골사리(佛骨舍利)와 금옥불(金玉佛)을 봉안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해 12월에 불당을 낙성하고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당시의 규모는 불전 · 승당 · 선실을 포함하여 26칸이었다.
특히 세종은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를 지어서 보관하게 하였다. 1449년에 세종은 경찬법회를 열었고, 1503년에 연산군은 내원당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1506년(중종 1)에는 내원당 · 수륙사(水陸社) · 능침사(陵寢寺) 등에 소속되어 있던 토지와 노비 등을 공신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건의하였고, 1566년에는 명종이 내원당의 토지를 내수사(內需司)에서 인수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배불의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서 철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