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년(광종 14)에 왕이 대원(大願)을 발하여 국찰로서 송악산 아래에 이 절을 짓고 친히 승려들을 공양했으며, 균여(均如)를 초대주지로 삼았다.
또한, 당시의 실력자 최충(崔冲)이 이곳에서 예비 등용문인 하과(夏課)를 베풀었다. 즉, 최충은 매년 여름이 되면 이 절의 승방에서,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한 선비들을 모아서 구경삼사(九經三史)를 강의하는 한편, 시로써 서로의 실력을 겨루게 하였다.
선비들이 시를 짓고 차례로 그 것을 읊조릴 때는 동자들을 좌우에 늘어서게 하여 위의를 갖추었으며, 장유유서의 범절을 엄격히 지켰다. 이 모임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이 되면 흩어졌는데, 보는 이들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또한, 이 절은 광종 이후 목종·선종·의종 등 여러 왕의 행차가 잦았으며, 중요한 법회의식이 거행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국찰이었다.
특히, 1085년(선종 2)선종이 이 절에 행차해 반승(飯僧)을 베풀었고, 1087년 대장경을 봉안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 의종은 1161년 4월 초 이 절에 들러 한달을 넘게 머물렀으며, 1166년(의종 20) 수문전(修文殿)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기도 하였다.
폐사연대 등은 알 수 없으나, 이정구(李廷龜)의 《화담기 花潭記》에는 이 절의 옛터에 석주가 남아 있었다고 했으며, 1945년 이전에는 거대한 당간석주와 함께 초석들이 산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