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슬갑사(嘉瑟岬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에 대작갑사(大鵲岬寺, 현재 운문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갑사(五岬寺) 가운데 하나이다. 오갑사는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남쪽의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의 소보갑사(所寶岬寺), 동쪽의 가슬갑사로 구성되었다.
『운문사사적』에는 오갑사가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600년(진평왕 22)에 원광(圓光) 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후에 돌아와 가슬갑사에 머물렀으므로 적어도 이때보다 앞선 시기에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점찰보(占察寶)를 두었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이후 후삼국 시기에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투면서 전란이 격화되었고, 후백제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청도 지역이 전투의 피해를 보게 되면서 오갑사가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 보양(寶壤)이 절을 중창하고 작갑사라고 하였으며, 937년에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아 토지 500결(結)과 운문선원이라는 사명(寺名)을 하사받았다. 따라서 현재 운문사를 제외하고 오갑사는 모두 사라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운문사 동쪽 9천보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으며, 현의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호거산(虎踞山)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작갑사를 세웠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네 개의 갑사는 동서남북 갑지에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오갑사는 신라 수도인 경주의 서쪽 방어를 위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가슬갑사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천과 관련이 있는 갑(岬)이 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 점찰법회를 열었던 만큼 교통의 요지이며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요구되며, 산릉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사찰인 만큼 지맥의 끝이 되는 갑지라는 비보적 조건을 갖춘 곳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곳은 현재 바깥 삼계리 일원을 비롯한 몇 군데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