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혜(觀惠)는 신라 말에 해인사에서 남악파(南岳派)를 이끌었던 화엄종의 고승이다. 같은 화엄종의 북악파(北岳派) 승려 희랑(希郞)과는 대립적 입장에 있었다.
화엄종은 통일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도적 사상이었으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관념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화엄종의 퇴락에 실망한 화엄종 승려들은 당시 새롭게 수용되고 있었던 선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선종이 불교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화엄종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내부의 자체적인 반성을 촉구하거나, 화엄 조사에 대한 숭배나 결사운동을 전개하는 등 조직적인 대응을 모색하였다.
해인사는 이러한 화엄종의 동향을 대표하는 사찰이며, 9세기 말 이후 화엄 교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0세기 초 후삼국 시기에는 화엄종이 희랑을 중심으로 한 북악과 관혜를 중심으로 한 남악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먼저 북악의 희랑이 고려의 왕건을 지지하고, 남악의 관혜가 후백제의 견훤을 지지하였던 정치적인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남악과 북악의 대립은 화엄사상의 이해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악은 의상계 화엄학의 정통을 주도하던 부석사(浮石寺) 학풍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고, 남악은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학풍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북악은 법장의 화엄을 수용하였지만, 의상 사상에 기반을 둔 신라 화엄에 중심이 있었으며, 그에 비해 남악은 화엄과 함께 『기신론(起信論)』을 동시에 강조하는 융합적 경향을 드러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관혜는 남악의 대표적인 화엄 학승으로 해인사에서 활동하였지만, 그의 저술이나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의 생애, 사상 등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남악과 북악의 대립은 고려 초에 북악 계통으로 알려진 균여의 등장으로 해결된다. 그는 남악과 북악의 차이를 해소하고 신라 화엄사상을 종합,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