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문 ()

장흥 보림사 전경
장흥 보림사 전경
불교
단체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의 한 산문.
이칭
이칭
가지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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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가지산문은 도의(道義)의 법통을 중심으로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 산문이다. 특정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은 사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산문을 형성하였다.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한 후 돌아와서 설악산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도의의 법통은 염거로 이어지고 다시 이관과 체징으로 이어졌다. 체징은 859년에 헌안왕의 명으로 전남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 머물렀다. 체징이 가지산 보림사에 있었을 때 가지산문은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후삼국을 고려가 통일하면서 선종은 점차 세력을 잃었다.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의 한 산문.
산문의 형성 배경

선종은 당 불교계에서 8세기 후반에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개창조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道義)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하였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참배하였다.

이후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으며,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도 인가를 받았다. 이후 도의는 821년(헌덕왕 13)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선 사상이 수용되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역사적 변천

도의의 법통은 염거(廉居, ?844)에게 계승되었으며,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풍을 확산시켰다. 염거의 문하에는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관은 봉림산문의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억성사에 머물면서 헌강왕의 초청을 받아 설법하였다.

체징은 18세에 출가하여 처음에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억성사의 염거를 찾아가 선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체징은 837년(희강왕 2)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3년간 각지의 선사들을 찾아다녔다.

840년(문성왕 2)에 신라로 돌아온 체징은 20여 년간 억성사, 고향 인근의 사찰 등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옮겼으며, 다시 헌안왕의 명으로 전남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이동하였다. 체징이 보림사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은 왕실과 진골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보림사는 본래 원표(元表) 대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체징이 입적하면서 헌강왕에게 ‘보림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보림사는 본래 중국 선종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절의 이름과 같으므로 신라 선종의 권위를 지닌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언경이 개인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였고, 망수택(望水宅) · 이남택(里南宅) 등이 금 160분(分)과 조 2,000곡(斛)을 내어 절을 장식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가지산파의 초기 형성과정에서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체징의 문도는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명이 있지만, 강진 무위사에서 활동한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로 계승되었다. 형미는 891년(진성여왕 5)에 당에 유학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으며, 905년(효공왕 9)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형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았지만, 궁예에게는 박해받았다.

고려시대의 가지산문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가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면서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이 다시 대두하고, 선종은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개창하는 과정에서 선승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선종은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세기에 이르러 선종이 서서히 부흥하였는데, 가지산문의 경우 학일(學一, 1052~1144)이 등장하여 다시 부각되었다. 학일은 1122년(예종 17)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고, 이후 1129년(인종 7)에 운문사를 하산소로 삼아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

학일 이후 가지산문의 동향을 보여주는 기록이 거의 없으나, 13세기 후반에 일연(一然)이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이 선종계를 주도하였다. 일연은 말년에 운문사에 주석하였는데, 이에 따라 가지산문의 중심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가지산문은 일연 문하의 보감국사(寶鑑國師) 가 주도하였다. 고려 말에는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출현하여 간화선을 절대화하면서 선종계를 풍미하였다.

참고문헌

『조당집(祖堂集)』
『조선금석총람』(경인문화사, 2002)
「신라 하대 체징선사와 가지산문의 개창」(조범환, 『정신문화연구』28-3, 2005)
「신라하대의 가지산문」(이계표, 『전남사학』7, 1993)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추만호, 『이론과 실천』, 1992)
「보각국존 일연에 대한 연구」(채상식, 『한국사연구』26, 1979)
「신라하대 선종 구산파의 성립」(최병헌, 『한국사연구』7, 1972)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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