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안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57~861년이다. 문성왕 대에 상대등에 있다가 조카인 문성왕의 유언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했다. 성주사 시주인 낭혜화상 무염에게 도움이 될 말을 청하여 생활과 통치의 철학으로 삼을 정도로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또 가지산파의 개창을 후원하여 무진주 지역의 불만세력을 회유하기도 했다.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자 861년 1월에 사위인 응렴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사망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上大等)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金明) 사이에 왕위계승 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興德王) 말년(836)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왕위계승쟁탈전이 일단락된 뒤, 즉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侍中)을, 그 뒤에는 병부령(兵部令)을 거쳤다가 다시 849년(문성왕 11)에는 상대등에 임명된 듯하다. 그리고 857년에 서불한(舒弗邯, 角干)으로서 조카인 문성왕의 유조(遺詔)를 받아 즉위하였다.
헌안왕(憲安王)은 즉위 전인 문성왕대에 성주사(聖住寺) 시주인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며 향과 차를 예물로 보내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위한 후에는 무염에게 글을 보내어 도움이 될 말을 청하여 자신의 생활과 통치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처럼 헌안왕은 왕자(王者)로서 통치의 사상적 이론을 불교 승려로부터 제공받고자 하였다.
성주사는 왕경(王京)의 흥륜사(興輪寺)에 편입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았다. 헌안왕이 응렴(膺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았을때 그 결정적인 조언을 한 승려가 흥륜사의 범교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과 왕실에 미치는 흥륜사의 발언권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헌안왕은 즉위 후에 무주(武州)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승(禪僧)으로 활동하며 교화를 펼치고 있던 체징(體澄)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와 특별한 연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체징을 859년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게 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는 것을 후원하였다. 이후 가지산문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왕경의 진골귀족(眞骨貴族)의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아울러 헌안왕은 이처럼 불교세력을 통하여 지방세력의 불만을 회유 · 통제하고자 하였다. 즉 성주사의 낭혜화상을 통하여 웅천주(熊川州) 지방의 김주원계(金周元系)를 통제하고, 가지산사의 체징을 통하여 무진주(武珍州) 지역의 불만세력을 회유하였던 것이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그 달 29일에 승하하였으며, 공작지(孔雀趾)에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