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가 형성되었는데, 진골은 성골(聖骨) 다음의 계급이지만 왕족인 점에서는 성골과 차이가 없다.
골품제는 골제(骨制)와 두품제(頭品制)로 짜여 져 있었는데, 골제에 편입된 신분은 사로국(斯盧國)의 왕족인 박씨·석씨·김씨이다.
그들은 신라가 왕족중심의 귀족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성읍국가(城邑國家) 혹은 연맹왕국(聯盟王國)의 지배자들 중 일부 유력한 사람들이었다.
김유신계(金庾信系)로 이어지는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왕족 역시 진골로 편입되었다. 내항(來降)해온 국가의 지배자들이 진골로 편입되는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적어도 귀족을 거느리는 큰 국가의 왕족이어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법흥왕(法興王, 514∼540)대에 율령이 반포되어 국가체제가 정비되었는데, 그것은 골품제의 성립과 상관관계에 있으므로 진골신분이 실재하던 시기도 법흥왕대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하는 시기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 성골과 진골신분의 구분은 애매하다. 신라 중고(中古)시대의 어느 시기에 진골신분이 성립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골품제가 갖추어지면서 왕족들은 진골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고시대 말에 왕족 내 혈연집단의 분지화(分枝化)가 일어나자, 진평왕(眞平王, 579∼632)계가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銅輪)을 직계로 내세우면서 진지왕(眞智王, 576∼579)계와 같은 다른 왕족과 구별하기 위해 성골관념을 표방했다는 설이 있다.
반면 진골은 성골과 대조되는 신분이기 때문에 성골이 갖추어지는 것과 동시에 진골관념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진흥왕 장자인 동륜계가 존재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둘 중 어느 학설을 따르더라도 진골과 성골은 진평왕대 이후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대에는 모두 존재한 것이 된다.
성골신분이 강등되어 진골이 되었다면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 점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혈족집단 내부의 분화과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견해에 의하면, 직계 혈연집단에서 멀어져간 방계 혈연집단이 어느 시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친족의 범위를 7세대까지 동일집단으로 파악해 8세대부터는 신분이 강등되며, 마침 김춘추(金春秋)가 방계로서 강등된 인물이라 한다. 그렇다면 김춘추는 8세대를 방계로 내려온 셈인데,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신라 중대에 왜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했는지는 중요하면서도 잘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실제 진골신분이 어떤 정치·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은 골품제에 의거해 장관직·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받으며, 통일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보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았다. 신라통일기 진골귀족들은 거대한 재력을 지녀 사병을 양성하였다.
그들의 호사한 생활을 반영하는 상징적 존재가 금입택(金入宅: 통일신라시대 금을 입혀서 만든 귀족들의 저택)이다. 사원 역시 그들의 원당(願堂)으로 변하고 있었다. 진골귀족은 사원을 경영해 합리적으로 재산을 도피시키고 있었다.
진골신분은 제5관등 대아찬(大阿飡) 이상의 최고관등으로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에 비해 기물이나 복색에 대한 제한도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진골귀족이 비대화되어짐에 따라 중대 전제왕권의 개혁조치는 실패로 기울고 있었고 한층 미약해진 왕권은 이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가 유명무실해지자,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을 위한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라 하대(下代)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신라 하대로 오면서 수적으로 증가일로에 있던 진골귀족은 일부가 6두품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범청(範淸)은 진골이었는데, 아들 낭혜(朗慧: 속명 無染)는 강등되어 6두품이 되었다. 낭혜가 왜 진골에서 6두품으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 분명한 정설이 없는 편이다.
역시 7세대 동일집단의 규모로 보아,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낭혜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낭혜 역시 태종무열왕으로부터 8대 동안 방계로만 내려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에 가담했으므로, 난이 진압된 후 낭혜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진골귀족 내부에서 왕위를 둘러싼 권력쟁탈전이 치열했는데, 여기서 패한 자는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연고지로 퇴거했으며, 이때 그들의 신분이 강등될 소지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