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시중을 역임한 귀족이다. 무열왕의 5대손이라고 한다. 777년 시중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에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하였다. 선덕왕 사후에 실권을 장악하여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추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경신이 정변을 일으켜 즉위하지 못하였다. 왕위 계승전에서 실패한 후, 명주지방으로 물러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고 칭해졌다. 강릉김씨의 시조로, 그의 후손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고려에 귀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유정(惟靖)이다.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5대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文王)의 5대손이라고 한다.
777년(혜공왕 13)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시중직에서 퇴임한 것은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한 78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막강했던 것 같다.
785년 선덕왕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해 선덕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을 추대하려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귀족들이 그를 왕위에 추대한 배경은 선덕왕의 친족 관계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세력 관계였던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金敬信)은 780년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세력을 잡아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지만, 실제 세력 면에서는 시중 직에서 물러난 김주원에게 오히려 뒤지고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성대왕조에 “이찬 김주원이 상재(上宰)이고, 각간 김경신은 이재(二宰)로 있었다.”라고 한 것도 당시 김주원이 세력 서열에서 제일인자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귀족회의에서 당연히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추대될 수 있었으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즉, 김경신은 왕위 계승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상 수단을 써서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삼국유사』에는 “왕(김경신)이 먼저 왕궁에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를 지지하던 무리들이 모두 왕에게 붙어 새로이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고한 꿈과 북천신(北川神)의 비호에 대한 설화가 전하는데, 당시 김주원의 집이 북천(北川)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으나, 김경신의 즉위가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원성왕계 왕실이 변칙적인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낸 내용이다.
김주원은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뒤 원성왕 일파에게 위협을 느꼈던지 중앙에서 계속 거주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지방에는 원래 김주원의 장원(莊園)이 있었고, 또 그와 연결된 친족 세력이 있던 곳이었다.
김주원은 이를 기반으로 지방 귀족화해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칭해졌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게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후삼국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왕순식(王順式)도 그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 가운데는 그가 강릉 지방으로 퇴거한 뒤에도 김헌창(金憲昌) · 범문(梵文) 부자처럼 계속 중앙에 남아 활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강릉김씨의 가계를 이루어 굴산사(崛山寺)의 사굴산파(闍堀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가문은 고려 초 새로운 왕조에 귀의해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