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산사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선승 범일이 창건한 사찰이다. 847년에 범일이 창건했다는 기록과 851년 명주도독 김공의 청으로 범일이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범일에 의해 굴산사는 사굴산문의 본산으로 발전하였다. 범일 이후 굴산사 관련 기록이 거의 없으나 발굴 조사 결과 11세기 후반에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전기 자료에는 기록되지 않아 조선 전기에 사찰이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승탑, 당간 지주 및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1936년 대홍수 때 경작지 일대에서 일부 주1와 ‘闍掘山寺(사굴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굴산사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식되었다. 1978년도에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1983년에 현 사적 지정 구역에 농업 용수관(用水管)을 매설하면서 주12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2002년에는 영동지방에 대규모 피해를 입힌 태풍 ‘루사’로 인해 강릉 굴산사지 역시 큰 수해를 입어 약 30일간 긴급 수습 주2를 진행하여 대략적인 굴산사지의 범위가 확인되었다. 이에 굴산사지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3년 6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강릉 굴산사지 전역에 대한 학술조사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굴산사는 주3과 탑비가 있는 북편과 중심 공간으로 추정되는 동편, 그리고 생활 공간으로 보이는 서편 등 3개 이상의 단위 공간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굴산사는 847년(문성왕 9)에 범일(梵日)이 창건하고 주4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신라 사람으로 집이 명주계(溟州界) 주5의 덕기방(德耆房)에 있다고 밝히고, 뒷날 범일이 본국에 돌아가거든 자신의 집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847년에 귀국한 범일은 그 승려의 청에 따라 그의 고향이라 일러준 곳에 굴산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한편 『조당집』에는 유학하고 돌아온 범일이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청에 의해 851년(문성왕 13)에 이미 창건된 굴산사에 주석하였다고 한다.
굴산사는 범일에 의해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번영에 명주 지역 김주원계의 후원이 작용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신라 왕실 및 중앙에서 내려온 진골과의 관계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성기에는 사찰 주10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고, 승려의 수도 200여 명이었으며, 쌀을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전한다.
범일의 입적 이후 굴산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강릉 지역의 주6 읍지인 『임영지(臨瀛誌)』에 범일이 지은 「탑산기(塔山記)」가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거란의 침입에 의해 굴산사가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발굴 조사에서 현 사적 지정 구역에서 확인된 유구는 대부분 12세기를 기점으로 조성된 것이라 11세기 후반 이후 대대적으로 중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등록(傳燈錄)』의 서문에 굴산사의 주지 혜식(惠湜)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14세기경에 굴산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그 이후에 발간된 문헌 및 지리지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는 사찰이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강릉 굴산사지 승탑,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강원도 문화재 자료인 석불 주8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극기(金克己)의 「굴산종시(掘山鐘詩)」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신라종이 안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도굴꾼에 의해 붕괴되었는데, 당시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조선고적보존위원회가 주11을 들추어 보았더니, 기단석 아래 구형의 지하 석실이 있고 오백나한을 안치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에 몇 구의 석불 좌상이 전해지고 있는데, 완전한 2구는 1968년에 암자를 짓고 함께 봉안하였다. 높이 1.5m의 굴산사지 석조 비로자나삼존불상은 얼굴이 파손된 채 머리에는 8각 관모를 쓴 모습으로 1992년에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석불 좌상들은 모두 한 손이 다른 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주9을 하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모습으로 석불 좌상은 비로자나불로 생각된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는 범일의 탄생에 얽힌 설화를 간직한 학바위[鶴巖]와 석천(石泉)이 있다.
굴산사의 창건과 변천을 통해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굴산문을 살펴볼 수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사원과 왕실 및 지방 세력과의 관계, 선종 사원과 비로자나불과의 관련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